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묵심도요, 이학천 명장

맛깔 2012. 2. 15. 22:18

   눈물 속에 피는 꽃은 고통으로 맺는 아름다움이다.

 

 

이학천 도예명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장의 영예를 얻었다. 하늘이 낸 천재가 아니고서야

저절로 그런 명성을 얻었겠는가?

 젊은 날의 한때, 이 명장은 고통과 눈물과 번민으로 잠 못 드는 밤이 많았다. 실의에 빠져 울부짖던 날도 있었다.

다만 오늘의 영광이 뒤안길의 고통을 감출 따름이다. 시인은 그의 마음을 꼭 집어 시를 지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시 중)

 

묵심은 이학천 도예 명장의 호다. 명장의 단호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호다. 고요히 침묵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흔들리다가 스러졌을 것이다. 그의 명성은 침묵으로부터 생겼고

그의 작품은 그의 고요한 마음에서 일어났다. 이 명장은 결단력이 있다. 아울러 침묵하는 겸양도 엿보이고.

이 분야의 대가들에 비하면 그는 앳되다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세월을 단축한 만큼의 노력을 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자기 명장은 문경(2), 충북(1), 상주(이학천), 이천(3), 전라도(1) 등에 8명 있는데 국가에서 선정하는 것이라

까다롭기 짝이 없다. 수상, 전시, 연구, 지도자 경력 등 외에 3 ~ 4번의 실사를 거쳐 4차까지 심사를 한 후에 결정된다.

그런 만큼 권위가 있다.

 

이 명장은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이다. 조상 중 한 분은 홍건적의 난 때 임금을 구명한 공으로 송황군 벼슬을 얻었다.

 이 명장은 그런 조상의 피를 이어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정신이 그의 작품과 삶에 반영돼 있어 작품은

 명품을 탐하고 삶은 고귀한 삶을 지향한다. 고귀한 것에 도전하는 삶이다.

 

한 참 윗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문경 관음요로 옮겨 왔다. 4대 조부 때의 일이다. 선조들은 모두 도자업에 종사하였다.

이 명장은 도예 명가 7대 후손인데 전해오는 집안의 얘기로는 도자업에 종사해야 집안이 일어난다고 하여 조상들이

도자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선친은 도예부문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였던 이정우 선생이다. 이 명장은 7~8세 무렵부터 물레가 장난감이었다.

술 좋아하시는 부친을 위해 주병백자를 만들었다고 하니 충효하셨던 조상을 본받아 효자(?)였던 셈이다.

명장은 일가를 이루셨던 선친으로부터 철저히 교육받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도자기를 빚는 것은 흙 치대고 물레 돌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인내와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음각, 양각, 투각, 상각 등의 기법을 배워야 하고 산수, 인물, 화조 등의 예능을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것만 익힌다면 재주다.

명품은 손재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맺힌 작품이라야 명품 반열에 들고 이 명품 반열에

들어야만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이 명장은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명장 칭호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좌절하기도 쉽다. 대충 사는 사람들은 이루고 싶은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로부터는 미래의 명인 감이라 칭송을 받았지만 이 명장 스스로 판단하니 능력의 한계가 엿보였다.

다른 명장들의 작품을 보니 그들을 능가하기는 커녕 따라 갈 자신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불과 10대 때의 일이니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대가들이 겪었던 인고의 세월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출중한 작품만

보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이 명장에게 산과 들을 다니며 하릴없이 빈둥대던 고통의 시절이 있었다. 몇 달을 그렇게 쏘다니던

이 명장이 꽃과 나무를 보니 문득 선사의 깨달음같은 것이 찾아 왔다. 환희에 찬 이 명장은 시를 읊었다.

 

장부의 뜻

 

춘삼월 호시절에 사시산천 둘러보니

꽃은 피어 화산되고 잎은 피어 청산됐네

수양강 버들가지 황금같은 꾀꼬리는

세류변에 왕래하니

대장부로 태어나 뜻 한 번 못 펼치랴.

 

 

 

자연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역할을 다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면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그날로 도자는 이 명장 필생의 화두가 됐다. 한 동안 버려두었던 물레를 돌아보았다.

그로부터 자나 깨나 물레에서 물러 설 줄 몰랐다. 머리에는 물레와 흙과 도자기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 세월이 제법 지나갔다.

 

이 명장은 몰입의 세월이 지나자 본인의 실력이 일취월장함을 느꼈다고 한다. 때로는 원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아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쉽게 절망하는 옛날의 이 명장이 아니었다. 실패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잘못을 깨우치는

기회이기도 한 것을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원인을 곰곰이 분석하면 해결 방안을 알 수 있었다.

생각은 깊어지고 명성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물건이 될 젊은이가 물레를 돌리고 있다.’

 

 

 

단련이 시간이 지나자 주위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9세 무렵 도요지를 맡았다. 믿음을 주는 분에게 실망을 줄 수 없는 일이어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작품을 만들고 도공을 다루었다. 젊고 힘 있던 시절이라 며칠 씩 밤을 새워 작품을 만들었다.

평판은 좋았고 작품을 만드는 신바람도 났다.

 

부친과 함께 서울, 경기도, 인천, 수원, 이천, 여주를 떠돌며 작품 활동을 하다 문경으로 정착한 것이 34세 무렵이었다.

문경 상주가 도자기의 좋은 학습 터였기 때문이었다.

 

두 지역에서 유물을 찾아 옛 도요지를 답사하고 파편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철저히 연구 분석했다.

재능에 노력은 빛을 발해 마흔 갓 넘은 나이에 도자명장으로 지정됐다. 7대에 걸친 도자명장 가문의 명성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 명장은 고려청자, 조선분청사기, 백자, 진사도자기. 다완, 다도구의 작품을 아우르고 작품을 만들기 위한 모든 과정과

가마 짓고 불 때기까지의 기능을 습득하여 한 몸이 도자기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명장은 말한다. “전통 계승을 뛰어 넘는 작품을

만들어야 후손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각오로 작품 구상을 한 명장은 고려청자레 조선분청사기에 접목한 다중분장기법도자기를 개발하였는데

세계도자역사에 이런 기법과 문양은 처음이었다.

 

이 명장은 상주의 옛 명성을 말한다. “전국의 네 군데 관요지 중 상주에 두 군데가 있었다. 나라에 진상하는 것이라

 품질이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로 인해 상주 관요지가 피폐해 졌다.

왜 관요지가 상주에 있었는지 궁금했다. 임진왜란 전 까지만 해도 분청사기의 본고장이었던 상주에서 터를 잡아

 600년간 끊겼던 공납 도자기의 맥을 잇겠다.” 이런 연유로 이 명장은 도예의 터를 상주 자연휴양림 내로 옮기게 되었다.

 

 

이 명장은 일생의 삶에는 항상 고비가 따라 오는데 극복하면 한 단계 도약의 기쁨을, 비록 실패하더라도

안목은 높아진다는 인생의 진수를 도예로 터득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리란 한평생 노력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쉽게 얻는 것, 쉽게 잃어버리고 어려움 끝에 얻은 것은 평생의 자산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옛 도요지, 상주의 명성이 이학천 명장의 명성과 함께 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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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처 : 상주시청 문화체육과 전화 054-537-6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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