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유건(儒巾)을 쓰는 마음으로 모자 만들기 45여년

맛깔 2012. 12. 15. 03:38

(2007년)

유건 : 조선 시대 유생들이 쓰던 실내용 두건의 하나.

 

부산제모사 류항우님의 모자 인생  

 

학문은 품성을 기르고 품성은 삶을 결정한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조선시대 서당은 효율이 낮고 둔재를 생산하는데 적격이라 가장 먼저 폐지해야할 것임에 틀림없다. 창의성 계발을 중요시 하는 요즘 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에 많은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서당의 학습법은 어떠한가. 매일 훈장님 앞에 꿇어앉아 외우는 것이 일이다. 무작정 암기는 현대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아닌가.

 

 

유학자 임창순 선생이 설립한 지곡서당(공식명칭 태동고전연구소)은 많은 학자들이 배움의 도를 익히기 위해 거쳐 간 곳이다. 교수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외우기다. 대학교수, 학생 등 이곳에서 배움의 도를 트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1학년 때 이곳에서 숙식하며 공부를 하는데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다 외워야 하고 2, 3학년 때는 3(시경, 서경, 역경)을 외워야 한다. 수업이 시작되면 전 시간에 배워서 외웠던 것을 확인하고 중간에 한 번 점검하고 책을 다 떼면 또 외워야 한다. 단 한 자라도 틀리면 짐을 싸서 나가야 한다. 읽다 보면 문리(文理)가 트여 문장을 알고 시()를 짓고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서당은 수 천 년 동안 내려 온 학문의 보배를 캐기 위해 한문을 가르쳐 준 것이고 학동들은 한문을 배워 진정한 학문의 세계로 나아갔는데 3년만 배우면 시서를 음미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서당만큼 좋은 습관을 길러주고 좋은 학습효과를 내는 곳은 없다. 매일 한 결 같이 꿇어 앉아 읽다보면 공부하는 습관이 잡힌다. 자세가 학문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다. 소리 내 읽는 것의 학습효과는 아주 크다. 스스로 소리 내 읽으면 외우기도 쉽고 혀끝에서 맴돌아 말하기 쉽고 귀에서 울려 오래 동안 기억할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서당학습법으로 교육받은 옛 어른이 19세 때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답안지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은 옛 선비가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서당 학동은 성현의 좋은 말씀과 도를 배워 이를 생활에서 실천하도록 배우면서 강요받았다. 그래서 선비들은 곧이곧대로 살았고 얼굴에서 풍기는 품격은 남달랐다.

 

부산제모사를 들어서는 순간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말 걸기가 어려워 쭈빗쭈빗 서 있으려니 그 분이 말을 걸어왔다. 부산제모사를 1961년부터 운영해 온 류항우 사장(72)이다. 알고 보니 서당학자의 풍모는 24세 때까지 조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한데서 나온 것이다. 시속에 때 묻지 않고 성현과 학문의 세계에서 독야청정하는 풍모다. 한학자에서 어떻게 변신하게 되었냐고 물어보니 한학자라니 가당치 않다고 하면서 살아 온 얘기를 해준다. 초등학교는 단 1년을 다니다 그만 두었다.

 

부산제모사는 원래 문경 사람 황태곤 님이 운영하던 것을 류 사장이 인수하였다. 한학만 배우던 사람이 신학문이 판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20세에 장가를 갔는데 집에서 책도 보고 농사도 거들며 세상을 하릴없이 보내고 있었다. 처삼촌 정길목 님이 박하나무를 재배하면서 비료를 구입하려고 은척 부면장 이항우 님을 만나 살아가는 얘기를 하다 부산제모사가 팔려고 내놓았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류 사장은 할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좋았는데 할아버지는 문짝을 짤 정도로 솜씨가 있었다고 한다. 류 사장이 이 방면에 재주가 아예 없었으면 인수할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그나마 믿는 구석이 있었다. 손재주와 격물치지하는 정신.

 

모자를 관찰하여 그 원리와 용도를 파악하니 만들기가 쉬웠다. 원래 모자를 만들던 기술자가 석 달 열흘을 가르쳐주고 떠나갔다. 모자는 주로 학생모를 취급했는데 교복을 입었을 때라 잘 팔렸다. 게다가 명찰도 취급하였으니 사는 것이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학교 선생님, 교장 선생님들과 두루 친했다. 한 때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배워 나가 몇 군데서 가게를 차린 적이 있었고 류 사장 혼자 하기가 버거워 부인과 부친이 도와준 적도 있었지만 세상이치에 변하지 않던 것이 있던가. 그렇게 경기가 좋던 모자 산업도 88올림픽을 유치하려던 전두환 정권 때 교복이 폐지되고부터 시들해졌다. 그리고 모자도 시장에 가면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으니 제모사 간판을 건 가게는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어 요즘은 그저 가게만 열어 놓는다고 한다.

 

학자 같은 분이 어떻게 사업을 오래 동안 지속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만약 일반인을 상대로 한 장사였으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주로 상대하였던 계층이 선생님과 학생들이었으니까 그럭저럭 사업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는 얘기다. 배움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남을 잘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직업 얘기는 거의 하지 않고 과외 일만 말했다고 나무랄지 모르겠다. 사람은 근본을 속일 수 없고 근본은 바른 학문과 바른 생활로 바르게 세울 수 있다는 얘기를 직업의 세계를 빌어 강조하고 싶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