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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바퀴의 치료사, 남산자전거 김수길 옹의 63년 치료 이력

맛깔 2011. 9. 20. 10:24

내가 살던 마을의 가구 수가 한 삼십 여 호 쯤 됐지 아마. 자전거 가진 집은 그 중 세 집밖에 없었어. 한 대는 우편배달용이고 두 대는 가정집에서 탔지. 처음 자전거 배울 때 얼마나 재미있어. 자전거 한 번 타려고 자전거 있는 집 친구를 숱하게 불러냈지” 상주시에서 가장 오래 된 자전거 수리점인 남산자전거점(상주시 신봉동 161-1번지)의 김수길 주인(80세). 고향 마을 가장에서 상주시내에 있는 상주초등학교까지 매일 왕복 10킬로를 친구들과 어울려 걸어 다녔는데 자전거로 통학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자전거 타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겠어.” 나중에 자전거 수리점에 견습생으로 들어 간 이유 중의 하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고 두 해를 더 다녀 상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주농잠학교에 합격했지만 6남매 중의 맏이라 동생들 공부를 위해 학교를 포기했다. 그리고 한 2년 동안 한약방하는 큰 아버지 밑에 있었는데 한약 일을 한 몫 하려면 진득하게 앉아 작두로 약을 썰고 한자를 익혀야 하는데 그 일이 참 싫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가방 들고 학교에 가는 것이 부러웠던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 일 게다

 

 

“도저히 한약방에 못 있을 것 같아 부친에게 얘기하니 부친이 내 손을 잡고 어머니 사촌 처남에게 데려갔지. 처남은 지금 대구은행 자리에서 ‘올림픽 자전거포’를 크게 하고 있었지” 크다고 해야 기술자 하나에 견습공 한 명이니 요즘에야 별 것 아니겠지만 당시는 자전거 도매를 겸한 점포가 상주에 단 두 곳이었다고 하니 그럴 만 하다.

 

 

 

해방 전후로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이 입 하나 덜 요량으로 부모 손에 이끌려 동네 가게 문을 두드리는 일이 많았다. 한약방은 아픈 사람을 낫게 해 주는 곳이고 자전거는 병을 예방해주니 김수길 소년은 건강과 관련 있는 직업만을 택한 것이다. 명의는 병이 나는 것을 예방해 주는 사람이다.

 

 

신입사원답게 청소를 하고 잡일을 거들었는데 여름에야 옷 덜 입고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끼얹으면 되지만 손 트고 갈라지는 겨울에는 참 힘이 들었다고 한다. 목장갑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지구 온난화가 되기 전의 동장군은 자전거연합조합에서 배급받아 쓰는 윤활유를 손에 살짝 바르면 막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기술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습득해야 되는 것이라고. 그래서 알아서 배워야 했다. 너무 잘 하면 선배가 경계하고 못하면 주인과 선배로부터 구박받았다. 주인은 기술이 없고 자본주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처음에는 도시락을 싸다니며 일을 배웠는데 6년이 접어들던 해부터 월급으로 보리쌀 한 말을 받았다. 눈칫밥 먹기 몇 년이 지날 무렵, 6.25 당시 폭격으로 자전거포가 사라져 버렸다. 주인은 지금 남문시장 부근의 서울약국 자리로 자전거포를 옮겨 영업을 계속했다. 청년이 돼 가며 익힌 기술은 혼자서도 한 몫을 거뜬히 할만 했다.

 

 

6. 25 종전 후 21살 노총각 김수길은 방년 18세의 이장애 규수를 맞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달콤한 신혼도 가난하면 쓴 맛과 다름없다. 새신랑은 독립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마침내 주인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했다. 당시 주인은 하루에 쌀 한가마 정도의 수입이 있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봐도 큰 수익이다.

 

 

해방 무렵에는 자전거포가 큰 이권의 하나였을 것이다. 차는 귀했으니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했는데 돈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포를 내려면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허가 조건이 자전거포를 열고 있는 주인들의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점포는 한 스물 서너 집 정도 됐다.

 

앞서 기술을 가르쳐 주던 선배가 독립하여 지금 동아아파트 맞은 편 중국집 태평관 자리에서 가게를 하다가 나이가 들어 김수길 새신랑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주인이 알고 극구 반대를 했다. 동아아파트, 가장 방면에서 오는 고객들을 뺏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외서에 매물로 나온 점포가 있으니 그것을 인수하라고 했다. 이번에는 미래의 사장, 김수길이 안 된다고 했다. 단골확보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주인이 독립을 축하한다며 허가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줬다. 가게를 낼 때 농잠중학교 오창환 서무과장이 김수길 청년의 성실성에 반해 많은 도움을 줬으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길 사장은 가게를 성실하게 운영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후, 국민승용차로 불리던 자전거 보급에 나서 꽤 많은 돈을 만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드럼통을 두드려 자전거를 만들었기 때문에 품질은 조악했지만 모든 물자가 귀한 때라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철판으로 용접해 당시 거의 비포장이던 도로를 달리면 잘 부러지고 떨어졌다. 도금 기술도 좋지 않아 녹이 끼면 잘 닦이지 않아 많은 고생을 했다. 화물을 가마니로 싸서 부쳤는데 가마니를 묶는 새끼를 빼, 녹을 닦았다. 포철이 생기고부터 고품질의 철이 생산돼 자전거가 고장이 잘 안 나고 튼튼하다고 하는 김수길 사장의 말에는 우리나라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과 기술력에 따라 수입에 감소한다는 아쉬움이 동시에 배어난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오다 펑크가 나면 남산자전거에 들러 구멍을 때우고 외상 장부에 금액을 적었다. 한 번 때우는데 30원을 받았는데 막걸리 두 되의 금액이었다. 월급쟁이들은 급여 날, 농민들은 추수 때 갚았다. 개업 때부터 적어 온 50여권의 외상장부는 상주자전거박물관에 기증했다.

 

김 옹은 꼼꼼한 성격으로 자질구레한 물품도 모으는 덕분에 귀한 부속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주시내 자전거 상회에서 오래 된 자전거를 고치다 부속이 없으면 남산자전거를 찾는다고 한다.

 

김수길 사장은 여태까지 큰 애로없이 살아 온 공을 아내에게 돌린다. 6남매 중 맏이에게 시집 와 동생들 공부시키고 자녀들을 제대로 키운 아내다. 이렇게 살게 된 것이 우리 집 밥쟁이 덕이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질그릇이 투박해도 오래 쓰면 정이 들고 매끈한 자기 그릇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밥쟁이는 질그릇처럼 투박하지만 노인 김수길이 삶의 동반자인 아내에게 쓸 수 있는 최상의 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