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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용사, 정무진 택시 기사의 운전대 62년

맛깔 2011. 9. 22. 07:00

학자가 드문 시절, 박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줄 알았다. 컴퓨터가 대중화 될 무렵,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줄로 착각했다. 아마 지금도 시대를 앞서가는 직업군의 사람들은 이런 오해를 받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차가 귀한 시절의 운전기사는 고급 인력이었다. 옛날 운전기사들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차에 관한 한 박사들이었다. 컴퓨터로 치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둘 다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자였다. 운전기사들은 차량을 매일 점검하면서 어지간한 고장은 직접 수리했고 차를 신주 모시듯이 해, 정비 불량으로 인한 사고는 드물었다. 운전기사가 되려면 조수부터 시작했다.

 

 

상주시 개인택시 정무진 기사(81세)는 그런 시대의 운전기사 출신이니 운전의 지존이나 다름없다. 상주초등학교를 나온 정 옹은 해방 무렵 대동정미소를 운영하던 선친(고 정기암)께서 화물트럭을 두 대나 가지고 있어서 일찍부터 차를 만졌다. 상주에 차가 몇 대 밖에 없었으니 으스대었을 법 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추억은 아름답고 과거는 미화된다.

 

 

만주를 유랑하고 온 숙부(정재학)가 한 대를 운전하고 숙부 친구가 다른 차를 운전하고 다녔는데 정 옹은 숙부 친구의 조수로 들어갔다. 정미소만 있어도 부자라 했는데 트럭도 있었으니 갑부 소리 들었다. 왜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께서 귀여운 손자가 워낙 차를 좋아하고 가업으로 정미소와 운송을 겸할 수 있으니 먹고 사는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해 부친에게 명을 내려 그렇다고 한다.

 

 

정무진의 17세 청춘은 아름다웠다. 부잣집 도련님이 차를 몰고 나가면 모두들 쳐다보았다. 천성이 순하고 착한 소년은 어려운 상인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돈 없는 장꾼들이 짐을 지고 가면 무료로 태워주었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차비를 받아 운전기사와 나눠 썼다. 상주 곶감은 당시에도 유명해, 화물칸에 새끼로 엮은 곶감을 한 동씩 서울로 운반해 주고, 두둑한 운임을 받아 부친에게 갖다 드렸다.

 

 

민족의 비극 6.25는 정무진 소년의 집안에도 큰 생채기를 남겼다. 집안의 귀한 재산이었던 트럭은 운전기사, 정무진과 함께 경찰로 징발되었다. 상주에 소개령이 내려 피난 가는 도중, 뒤를 보니 상주에 큰 불기둥이 일었다. 나중에 들으니 현재 롯데리아 뒤편에 있던 집이 정미소, 나머지 트럭 한 대와 함께 폭격으로 불탔다고 했다.

 

경찰 물자 수송 도중에 육군 7연대 3대대로 강제 배속을 당해 군속으로 물자를 수송하게 되었다. 경주, 안강 전투는 총알이 운전대를 뚫고 들어 올 정도로 치열해 차량을 버려두고 후퇴하는 미군을 따라갔다. 전세가 역전돼 부대로 원대 복귀했다가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지만 차량은 무사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수송버스는 아군기의 오폭을 막기 위해 포장 위에 대공표시를 하고 다녔다.

 

군인은 걷고 차는 가마솥과 식량을 싣고 다녔다. 잠깐 쉬는 틈에 가마솥을 걸고 밥을 해 큰 장조림 하나와 함께 군인들에게 배급해 주면 군인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대동강 물을 마시고 진격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때 대동강 철교가 끊어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 수송 도중에 안동에서 차가 주저앉아 폐차를 했다. 비록 군속으로 운전을 했지만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 섰다는 자부심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형사가 찾아 와 병력 미필이라며 군으로 다시 끌고 가 제주도 훈련소로 데려 갔다. 그때가 1953년 1월이었다. 일가족의 비극이 이때 일어났다. 손자와 아들이 보고 싶어 하던 할머니와 아버지가 제주도까지 면회를 왔다. 외박 보내 달라고 할 주변머리가 없었던 정무진 이병은 면회소에서 할머니와 아버지를 잠깐 만났다. 그런데 두 분은 며칠 후 제주도에서 그만 돌아가셨다. 아마 배를 타고 오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제주도 훈련소를 거쳐 수송부대의 일원으로 삼척에 도착하니 옛날 부대에 함께 있던 상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의 소개로 연대장의 차를 운전하다가 그 해 7월에 제대했다.

 

집으로 돌아 온 후, 후생사업을 나온 군인들을 도와 계속 운전을 했다. 군부대는 헌병감의 정식 허가를 받고 군 트럭을 수송에 사용하고 운임을 받아 부대 운영 경비로 사용했는데 이를 후생사업이라고 했다.

 

1955년 서울에서 운전면허증을 따고 사회로 돌아왔다. 버스 기사로 여러 회사와 많은 지역을 떠돌았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때 한진고속의 기사로 멋진 안내양과 함께 고객을 모시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고 한다.

 

운전대를 잡고 생활한 지 어느 듯 42년 쯤 되었을 때 장관 표창과 함께 개인택시면허를 받았다. 정 옹은 차를 4대나 바꾸고 지금도 건강하게 핸들을 잡고 있다. 일요일이면 결혼 한지 52년 된 아내 박경춘 여사와 함께 온천을 하러 다닌다. 자녀들은 대구와 서울에서 사는데 손자들과 전화하는 것이 그렇게 즐겁다고 한다.

 

정 옹의 운전 경력을 보면서 직업 변천의 역사를 알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운전만큼 그 부침이 심한 직업은 없었을 것이다. 해방 무렵, 요리집에 가면 군수상보다 더 좋은 상차림을 받았다던 운전기사는 오늘 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되었다. 어떤 직업을 택할 까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충고해 주고 싶은 말은 다소 어렵더라도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직업을 택하라는 것이다. 드문 것이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