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장인들/장인들

경북의 명인 명장, 죽림당의 잠룡, 서재석 님 (5-2)

맛깔 2011. 6. 30. 08:00

 

글 : 하춘도, 사진 : 강석환

월간중앙 2011년 7월

 

문경 모전동 조그만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있는 서재석 님은 오죽과 조롱박으로 차 숟가락(차시)과 차 거름망을 만든다. 차라면 초의선사와 다솔사 최범술 선사를 떠 올릴 정도로 차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차인들도 차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 차인들은 다완과 차시의 값어치를 거의 동일하게 치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가치가 잊혀 진지 오래다. 오래라고 하는 것은 초의 선사도 애용한 차시가 다완과 차에 비해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그만 대나무 한 조각의 차시가 작가와 그의 사용자 이력에 대한 족보에 따라 몇 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 작가는 대학에서 불교미술학을 공부하고 절 생활을 30여년 해 왔다. 탱화를 그리고 불상 조각을 하는 등, 절 짓는 일 빼고는 다 해 봤다. 한 10여 년 남짓 사찰 생활을 했을 까. 새로운 호기심이 일었다. 사찰 일은 내가 아니어도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을까? 선사들이 화두에 침착하듯 그의 대나무 고행길의 시작이었다.

 

 

그 무렵 노스님과 차를 마시다 우연히 차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전까지 차시를 봐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옛 문헌을 뒤지고 그의 재질인 대나무를 살피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차시의 과학성과 선조들의 혜안이 놀라왔다. 대나무의 성질과 옻의 접착성 등, 알고 배워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제대로 만든 차시는 몇 백 년이 지나도 그 원형과 품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대나무를 안다는 사람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옻 또한 공부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녔다. 전국 도처에 유고수라, 불교 미술에 나름대로 조예가 있다고 자부했지만 만나는 사람들 하나 하나가 스승처럼 보였다. 묻고 또 묻고 그래도 미진하면 또 물었다.

 

대나무는 꼿꼿한 기상답게 타협을 않았으니 말차가루 미세한 입자 하나도 차시에 흔적을 못 남기게 했다. 팔만대장경은 천 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으니 차시도 그러하다. 오죽을 소금물에 3여 년을 절였다가 5~10 여년을 말려야 대나무에 칼을 대도 터지지 아니했다. 생죽이라야 굽힐 수 있고 껍질을 벗기지 않아야 말차 가루 한 터럭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선조들이 차시로 오죽을 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시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날로부터 거의 20여년이 지난 몇 년 전부터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하여 연 4회 입상하였다. 보통 스승과 계보가 있어야 상을 받는 거에 비하면 나 홀로 작품으로 입상한 것만도 해도 파격적이었다.  

 

제자가 없냐고 물어보니 오죽차시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배곯는 형편이라 받아들일 입장도 , 오더라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한다. 국내에는 오죽다시를 아는 차인이 드물 뿐 더러 설사 안다 손 치더라도 오죽 한 조각의 가격만 생각하지 그것을 제작하기 위해 투자 된 1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불교 미술에 매달린 30 년 넘는 세월을 보지 못한다.

 

 

난은 변이로 인해 한 포기에 몇 억 원을 호가하는 수도 있다. 선생은 오죽에 이어 황죽의 기이함을 발견했다. 황죽에는 거뭇거뭇한 자욱이 남아 있는데 이는 병이 아니다. 산반(散斑), 성반(星斑), 사피(蛇皮), 호피(虎皮)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것을 황죽의 변이라고 한다. 이 무늬가 들어간 차시는 임자를 만나면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한다. 일본에서의 얘기다. 일본에는 차시 문화제가 열리고 차시 만드는 명인과 국보급 차시가 있다.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겠지. 꿈에 대나무가 몇 번이나 보이기에 찾아갔더니 용의 변이된 황죽을 발견했다. 그 대나무 밑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삼배 후 대나무를 잘랐는데 자른 부위에 맑은 액체가 맺혀 마셨더니 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나 깨나 대나무를 생각하는 선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가 오죽손잡이에 새겨 놓은 문양이 공주여주박물관 편찬 도록에 나온 옛 사람들의 칼 손잡이에 있는 문양과 같았다. 옛 사람들의 무기는 칼이었고 요즘 무기는 문화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연히 조롱박으로 차 거름망을 만들게 됐다. 구멍을 예술적으로 뚫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섬유질이 나와 그 구멍이 막히는데 막히지 않는 비법을 알아내고 특허를 낸 사람은 선생뿐이다. 조롱박 거름망 비법의 발견에 3년 세월이 걸렸다. 그는 이것으로 차시를 계속 공부하라는 부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조롱박을 직접 재배하고 올해 처음으로 문경찻사발 축제에 내 놓았는데 10만원이란 비싼 가격에도 없어서 못 팔았다.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두 종류의 아내를 지닌다. 악처이거나 양처이거나. 오죽차시에만 매달린 작가의 뒷바라지는 전적으로 학교 선생님인 아내의 몫이었다. 남편의 뜻이 확고했기에 아내는 오직 묵묵히 남편의 뜻만 따랐다. 하여 부부는 자식도 하나만 두었다.

 

 

연락처 :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 5동 (문경시청 뒤)

전화 : 010-3007-0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