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장인들/장인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만든 차시(차 숟가락)과 조롱박 거름망

맛깔 2013. 1. 2. 06:39

 

단군 이래 처음으로 만든 차시(차 숟가락)과 조롱박 거름망

‘천재란 아흔 아홉의 노력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사람’ - 무명시인

글 / 하춘도

사진 / 범최

 

 

 조롱박 제목이 거창하다. ‘까짓 조롱박 거름망 하나에 단군의 유구한 역사가 들어가야 된단 말인가?’

조롱박 거름망에 어떤 연유가 있어 이런 명성을 얻는지 궁금한 분들에게 유명한 글 하나를 소개한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된다.’라는.

 

명품은 자연에서 하나라도 더하거나 감하지 않는 것. 선현들은 이를 천의무봉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어려우면 손을 댄 듯 대지 않은 듯 하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해 보일 듯 말 듯 이라고도 한다.

애플사의 천재 스티브 잡스도 ‘단순함이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단순함에서 나온다.

말이 길면 쓸 말이 적다.

 

조롱박 거름망은 차인들에게 꼭 필요한 물품으로 차를 거르는 것이다. 차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거름망은 있었고 지금도 다양한 종류의 거름망이 개발되고 있다. 어떤 것은 대나무나 쇠를 이용했고

좋은 세월 만나면 은을 활용하기도 했다. 도자기로 만든 것은 흔하고. 

 

죽림당의 서재석 작가는 차시와 조롱박 거름망을 만든다. 그의 조롱박 거름망은 지극히 평이하다.

구멍 뽕뽕 뚫려있고 금박이 조롱박 입구에 칠해져있으며 손잡이에 금으로 입사한 정도랄까.

너무 평범해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지만 서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서 작가는 조롱박 거름망을 들고 ‘디자인이 남다르니 알아 봐 주십사.’하는 심정으로 특허사무실을 찾았다.

처음에 시큰둥하게 듣던 변리사가 무릎을 탁 치며 얘기했다. “특허 냅시다.” 단순한 조롱박 거름망에

특허 2개가 있다. 구멍 뚫는 것이 발명특허라면 은으로 고리를 만든 것은 의장특허다.  

  

동국대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한 서 작가는 30여 년 동안 사찰을 다니며 단청하고 탱화 그리며 구도 여행을 했다.

개금하면서 옻과 금의 성질을 몸으로 익혔고 여러 스승들로부터 별의 별일을 다 배웠다. 그 스승은 학문

높은 분도 있었고 목수와 조각가도 있었으며 지극 정성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이름 모르는 공양주도 있었다.  

 

 

 

서 작가는 산에서 기이한 일을 많이 체험해서일까? 산중 기인들이나 알법한 신비한 얘기를 자주 한다.

그는 말의 어원을 잘 풀이한다. 말의 근원이라는 것이 깊은 생각과 많은 체험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생각의 깊이와 체험의 폭이 얼마나 넓은 지 상상할 수 있다.

 

 

 

탱화 그리고 조각하는 일을 전생의 업 인양 묵묵히 했지만 마르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없을까?“ 세월은 흐르고 고뇌는 깊어갔다. 절 일 시작하여 20여 년 쯤 지난 어느 하루.

노승이 서 작가에게 차를 따르며 한 마디 던졌다. “대나무는 성질이 독특해서 사군자야.”

 

 

대나무 겉은 검거나 노랗지만 속은 희니 맑은 사람의 품성과 마찬가지고 비움으로 단단함을 받쳐주니

마음 비운 사람이 강한 사람과 같다. 서 작가는 무심히 차탁위에 놓인 대나무 차시(차 숟가락)를 봤다.

문득 떠 오른 생각 하나. ‘대쪽 성질을 죽이고 타협 않는 성질을 살린다면.’

 

 

 

성질을 죽이면 조각을 할 수 있고 타협하지 않는 성질을 살린다면 이물이 묻지 않는다. 차시에

이물이 묻으면 고유의 차 맛이 사라진다. 금방 자른 대나무는 성질이 살아 있어 칼을 대면 쪼개진다.

대쪽인생이라지. 냄새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대나무다. 그것도 대쪽 인생이라지.

 

 

생죽에 칼을 대면 갈라져 더 이상 작업할 수가 없다. 대나무의 곧은 성질을 죽이기 위해 껍질을 벗기면

대나무 고유의 꼿꼿함을 활용할 수 없다. 사람도 자아가 죽어야 깨달음을 얻어 새 삶을 살 듯 대나무를

살리려면 고유의 성질을 죽여야 한다. 전국을 떠돌며 산중 고수를 찾고 책을 읽었다. 소금물에 삶고

오래 말려야 한단다. 얼마만큼 오래? 최소 5년 이상. 서 작가의 보물은 5년 이상 된 오죽과 황죽이다.

집안 곳곳에 5년에서 10년 이상 된 대나무가 마르고 있다. 

 

 

우리나라 대나무의 품질은 중국과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바 아니다. 무늬의 변화무쌍함과 유연함과

단단함이 월등하다고 한다.  

 

 

작가는 차시에 적합한 대나무를 찾아 방학이면 아내와 함께 짐을 쌌다. 낯 선 동네에서 텃세 놀이하는

개에게는 초코파이를, 대나무 주인을 위해서는 선물을 준비한다. 간절함 덕이었을까? 꿈에 세 번이나

나타 난 대나무를 캐 그에 새겨진 또렷한 용 문양을 보고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대나무도 삶의 목적을

이루었는지 자른 면에 이슬 같은 감로수를 쏟아냈다. 그 달콤함이란.   

 

 

아내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서 작가는 아내를 삶의 도반으로 생각한다.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아내를 존중하는 서 작가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위대한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밤새워 만든 작품을

아내에게 보이려고 거실에 옹기종기 모아 놓으면 아내는 이를 보고 남편의 마음을 짐작하고 감격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자, 아내가 슬기롭거나 악처거나.

 

 

재질의 으뜸은 오죽이 첫째고 황죽이 두 번째라. 무늬의 변이가 들어온다면 으뜸의 순위는 바뀐다.

황죽을 따라 올 것이 없다.

 

삶고 잘 말린 대나무에 조심스럽게 칼을 댔다. 숟가락 부분은 살짝 파고 손잡이는 뚫새김하여 금박은

입히고 실 장식은 금으로 했다. 금 입사 기법이다. 사계가 뚜렷한 우리나라에 비해 변형 문양이 없어

밋밋한 일본의 차시도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서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일본 것을 보면 헛헛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의 작품은 문양과 기교가 뛰어 나지만 단순하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우니 신비롭다고 할 수 밖에.

서 작가는 오죽차시로 전승공예대전에서 네 차례나 상을 받았다. 전승이 스승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독자 계보를 이룬 서 작가의 수상은 경이롭다. 이로써 생의 목적 하나는 달성했고.

 

 

차인들의 탄성을 뒤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 삶이란 돌고 돌며 주고받는 것이다.

도반처럼 함께 작품을 하는 도예 작가가 기능장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가가 기능장이 돼 버렸다.

서 작가가 더 기뻤다. 도반의 가능성에 대한 제 안목의 확인이었으니.

 

기능장이 조롱박 하나를 내 밀었다. “이것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느낌이 오니 고수다.

 ‘물건 하나 건졌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잠 못 드는 시간이 또 왔다. 무엇일까?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려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느낌은 있는 것이. 그 세월이 일 년 이었다.

 

 

차를 하며 숱한 거름망을 봤지만 무엇인가 어색했다. 쇠는 쇠대로 조롱박은 조롱박대로 그리고 도자기는

도자기대로. 도자기에 큰 구멍을 내고 천을 덧댄 거름망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세월 지나고 습기 차면

냄새가 물씬 났다. 그래 조롱박 거름망을 만들자.

 

생각만큼 쉬운 일이었으면 벌써 명품이 나왔을 게다. 구멍을 뚫고 찻물을 부으면 섬유질이 계속 흘러나와

막히고, 막힌 것을 제거하고 또 부으면 섬유질이 다 빠져나간 조롱박에 큰 구멍이 났다.

이것이다. 뚫어 놓은 구멍은 유지하되 찻물이 잘 흐르고 위생적이며 수명은 반영구적인 조롱박 거름망일 것.

 

 

입술이 타고 살이 빠졌다. 한 번 몰두하면 침식을 잊는 서 작가다. 그이만 유별난 게 아니고 이름깨나 얻은

창작 작가들은 모두 그러하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산중 생활에서 얻은 지혜를 모으고 시중 선배들의

조언을 얻었다. 물방울은 돌도 뚫는데 정신을 모으면 그것 하나 해결 못할까.

 

잘 익은 조롱박을 첫 서리 내린 뒤에 따야 된다. 시련을 겪은 사람이 여물어 지듯 모진 고난을 겪은

조롱박이 단단해 지기 때문이다. 서리는 농산물에게 고난이다. 그런 뒤 자르고 파서 소금물에 삶고

열흘 이상 잘 말려야 한다. 그래야 보존성과 가공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조롱박에 구멍 백 여 개를

뚫고 천연 방습, 방부 물질 일곱 번과 금박 두 번을 입혀야 한다.

 

 

구멍 크기가 크면 찌꺼기가 빠져나오고 작으면 물이 흐르지 않는다. 구멍이 생명이다. 금 입사와

은고리는 추가다. 조롱박 거름망 하나 만드는 기간이 정확히 일주일이다. 구멍 뚫어 문양 내고 금

입사하는 것은 쉽다지만 금박과 천연 추출물을 아홉 번 바르고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구멍 막히지 않고 물이 잘 흘러내리며 온도의 수축과 팽창에 따른 조롱박 터짐 현상이 없어진다.

보지 않고 믿지 않는 자 조롱박에 구멍 뚫어 뜨거운 물 부어 보시라. 막히고 터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니.  

 

 

서 작가가 조롱박 거름망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연필, 드릴, 바늘과 조각칼이고

재료로는 조롱박과 벌집 추출물, 금, 은과 알려 줄 수 없는 몇 가지 자연 추출물이 있다.

몰두하는 정신과 몸에 익혔던 조각, 그림, 금박 등의 기능은 말할 것도 없고.

 

 

 

백범 선생의 말처럼 문화의 힘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대가 왔다. 서 작가는 차시와 집게

손잡이 부분에 들어갈 문양을 고민하다 박물관도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손잡이에 가장

어울리는 문양이 환두대두의 손잡이 문양이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무력이 타인을 굴종시키는

힘이었지만 현대는 문화가 타인을 끌어당기는 힘이다. 바야흐로 무에서 문의 시대로 넘어 왔음을 깨달았다.

같은 문양이라도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시대를 꿰뚫는 통시성이 있지만 동시대의

차별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조롱박을 뒤집어 불빛에 비쳐보면 다양한 문양이 참으로 아름답다. 연화문과 부처님 손바닥에서부터

사군자, 조화문까지 거의 100여 개의 작은 구멍이 불빛을 은은히 쏟아낸다. 서 작가는 구멍 뚫는

작업을 하면서 발원할 것이다. “비노니 조롱박에 구멍 나 작품이 되듯 막힌 마음도 뚫려 새로운

세상과 통하여 지이다.”

 

 

문경 찻사발 축제의 조롱박 거름망과 차시 전시장은 인산인해였다. 서 작가의 작품 가격은 상상을

초월해 조롱박 거름망과 차시 하나에 1~3십 만원이나 하는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아니 서 작가는 보존을 위해 안 판 작품도 많았다. 가격을 물어 본 차인들 대부분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보 차인들도 그랬다. 그러나 삼족오와 연화당초 문양이

그려진 차시 세트를 본 차인들과 도자 장인들은 가격이 아니라 그의 작품성에 놀랐다. 어찌 알겠는가?

서 작가의 조롱박 거름망과 차시로 인해 한국이 문화민족임을 증명하는 날이 올지.

개미는 작아도 탑을 쌓는다.

 

 

서 작가는 말한다. “세상에 하찮은 물건은 없다. 하찮게 생각하는 교만함이 있을 뿐.”

하찮게 생각했던 조롱박에 예술과 실용이 함께 할 줄이야 오천 년 역사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명장이란 호칭 없어도 작품 하나로 새로운 차 문화를 연 서 작가는 탁월한 재능에 기대 새

세상을 찾고 있다. 허명은 가고 실속의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