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조선왕가호텔 (2)

맛깔 2012. 7. 23. 13:41

 

 

막대한 예산도 그렇거니와 불편한 한옥에 드는 시간을 다른 곳에 투자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지 않겠냐는 소리에 귀 기우릴 남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온고하는 마음으로 고택의

탁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건축을 전공한 남 회장은 장교로 근무하면서 명령에 따라 법당을 짓게 된다. 당시 학교에서 한옥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아 남 중위는 전국의 이름있는 대목과 한옥과 법당을 다니면서

귀동냥 눈동냥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한옥의 과학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눈을 떴다.

아름다우면서도 과학적으로 지은 집이라면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처마, 현수 곡선, 주춧돌과 대들보, 풍경, 서까래와 보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고 베르누이 정리와 복사열을 이용한 공기의 흐름과 들창 등은 과학의 정점을 찍는다.

 

또 한지는 어떠한가? 남 회장은 한지만 생각하면 조상님의 혜안을 거듭 우러러 보게 된다고 한다.

건기에는 창호지가 수축, 기공이 넓어져 안팎의 공기가 잘 통하지만 비올 때는 창호지가 팽창해

바깥의 습기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비결을 어떻게 알았을까? 가을 밤, 달빛 은은하게 비치는

창호에는 아닌 듯 맞는 듯, 속과 비속의 세계를 분리하는 듯 아닌 듯해 가을밤 창호를 보는 이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이를 설명해 주면 저들이 더 우리 조상의 과학성과

예술성에 놀란다고 한다.

 

 

남 중위는 법당을 손수 설계하고 지은 24세 때를 잊지 못한다. 법당을 짓고 난 세계와 짓기 전

남 중위의 건축 세계관이 확 달라졌던 것이다. 고승들은 참선의 수행을 통해 깨닫지만 남 중위는

한옥과 법당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한옥의 우수성을 알고는 외국 사람들과 얘기해도

조금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문화민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절집을 지은 스님들은 우주의 원리를 읽었던 분들이 틀림없습니다. 법신사상이 깃든 대웅전,

요사채와 법당 사이의 거리 등 이모저모를 살펴보면 허투루 지은 절집이 없고 철학과 정확한

원리에 따라 지어 절집은 통일감이 있고 아주 편안합니다. 건축이 종합예술이어서 종합되지 않으면

불편합니다.”

 

 

그는 3대째 취급하는 한약재의 과학화를 위해 성균관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이론이 뒷받침되고

한약재회사를 경영해 재력이 있어서인지 마음에 여유롭고 시야가 넓다. “문화의 시대가 왔습니다.

한류와 K-pop은 문화입니다. 한옥에 한국 문화를 접목하면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두들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법당을 지으면서 풍수가 참이라는 것을 알고는 좋은 땅을 얻기 위해 전국을 다녀 1992년 풍수의

교과서라 불리는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현 조선왕가 호텔 부지를 구입했다. 배산 자은산과 조선왕가

후원이 야생화와 수령 100년 넘은 참나무 숲이 수 십 만평에 이르고 반딧불과 도롱뇽이 서식하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조선왕가를 휘돌아 흐르는 임수 한탄강은 주상절리의 빼어난 비경을 이루고 있다.

조선왕가 앞의 종현산은 풍수상 부가 쌓이는 노적산 모양이어서 거부를 생산하는 수 백 만평의

연천평야를 앞뜰로 만들었고 이 뜰에 백로와 수 만 마리의 철새가 날아들어 장관을 이룬다.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다시 건축한 조선왕가는 100칸의 좁은 방을 20여 칸의 넓은 방으로 합치고

방마다 현대식 화장실을 들여놓았다. 또 건물 배치를 풍수와 지형을 따져 원래와 다소 달리 했지만

집 맵시가 있으니 격에 맞게 잘 들어 앉혔다고 볼 수 있다.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옛 건물 배치대로만

하면 옷에 사람을 맞추는 격이어서 무엇인가 틀어지는 형세였다.

 

안목 있는 사람은 건물 외형으로 당주의 품격을 짐작하지만 당주의 생각을 단숨에 알 수

있는 것은 글이다. 염근당 해체작업 중에 발견한 상량문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이신 홍문관 대제학

무정 정만조 선생께서 짓고 명필 농천 이병희 선생께서 썼다. 열 정승과 바꾸지 않는다는 대제학

무정 선생의 상량문 마지막 문장은 ‘꽃 한 송이 돌 하나라도 반드시 신중하게 지키시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은택이 영원히 보존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으니 장소는 달리 했을지언정 명맥을

더욱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으니 당주의 바람이 헛되지 않다.

 

 

 

남 회장은 염근당 상량문과 주련 26개 그리고 창덕궁 연경당 및 선교장에 주련을 남기셨던

농천 선생의 글씨에 빛을 더하기 위해 현세의 명필 이당 선생에게 격에 맞는 글씨를 써 주도록

간곡히 청을 했다. 염근당 건물의 주련을 보면 뜻은 몰라도 글씨가 참 좋다는 느낌이 온다.

명품은 설명할 수 없어도 품격을 느낄 수 있고 아닌 것은 자세히 보면 치졸함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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