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황혼

맛깔 2003. 1. 1. 20:04

오늘은 추석을 하루 앞둔 날입니다. 추석이 다가오면 부친께서는 당신 부친의 산소에 성묘를 가기 위해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십니다.

오늘도 부친과 동생 그리고 저는 벌초를 가기 위해 짐을 챙겼습니다. 어머니와 아내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고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부친께서 연세가 들어가면서 아픈 곳이 점차 많아진다고 하시는군요. 오늘도 허리가 결린다고 하셔서 비에 산길이 미끄러워질까

어머니께서 마음을 졸이셨습니다.

    

산소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약 40분 정도 걸리는 '원동'에 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산소까지는 산길에 익숙한 저도 쉬지 않고

30분 정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순 아홉 되신 부친께서는 쉬엄쉬엄 가셔야 하므로 약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요즘에야 길이 좋아져

산소까지 가는 시간이 요만큼 밖에 안 걸리지만 당시에는 산길이 험하여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를 부친의 고향인 원동

 산등성이에 묻어야만 했던 것은 선조들의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해방 이듬 해, 할아버지께서 돌림병이던 콜레라에 걸려 돌아가실 때, 부친의 나이는 불과 열 네 살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고향인

원동에서 살기 어려워 친척들의 주선으로 어린 나이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가셨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가게에 들어 가셔서 일을 배우다 타고 난 성실성을 인정받아 큰 공장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부친께서는 휴가철에

가정적이던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여행하셨던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십니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시기 전에 초등학교 6학년이던 부친께서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시골에서 쌀을 사다가 도시에서

팔아 돈을 많이 버셨다고 합니다. 일본 패망의 혼란기였을 때입니다. 그리고 1946년 초 귀국선을 타고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돌아오시던 날 부산항에서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을 잃어버리시고 귀환동포수용소에 들어 가셨습니다. 이럭저럭 생활하시다가

고달픈 몸을 기댈 곳을 찾아 고향인 원동 배내골에 오셨다가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사흘 날 밤을 앓던 할아버지는

40대 중반에 이승을 떠나셨습니다. 주위 어른들의 뜻에 따라 산에 할아버지를 묻고 내려 온 가족들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부친의 고생은 시작되었습니다.

 

부산근교에 사는 분들이 잘 아는 원동에는 천태산, 배내골이 있습니다. 지금은 배내골이 개발이 잘 돼 있고 도로가 아주 좋아 차가

수시로 다니는데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배내골까지는 해방 이듬해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날 때까지 하루에 한 두 편의

차편밖에 없어 걸어 다녀야 했는데 심부름하던 14세의 소년에게는 거의 하루 종일 걸렸다고 합니다.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숲 속의 묘지를 지나고 개울을 건너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무서움을 떨쳐 버리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고 합니다.

 

부친께서는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실 수가 없어 독학으로 한글을 깨쳤습니다. 부친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면 한창 어리광을 피우며

귀염을 받을 16세부터 양복점 보조를 시작으로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미군부대에서 높은 분의 양복을 해 줄 정도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답니다. 당신의 그 고생으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아들도 있으니 한 알의 밀알이 알찬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지긋지긋한 고생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마다 않고 하시던 분이 이제는 자식을 다 키워 놓고 황혼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부친께서는 손녀보다 불과 3살 많은 나이에 당신의 부친을 여의시고 한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 오셨습니다. 구부정한 어깨,

여윈 볼과 주름 진 얼굴이 당신의 훈장입니다. 그 부친께서 허리가 아프셔서 내년에 이 길을 다시 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부디 오래 사셔서 자식들이 당신과 함께 할아버지 산소에 계속 벌초를 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나의 영웅 그분의 존함은 영자 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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