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마지막 대장장이, 홍영두 님의 52년 불꽃인생 (3)

맛깔 2011. 6. 22. 18:28

 

사진 : 강석환, 글 : 하춘도

지수화풍(地水火風). 모든 것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흙으로 물로 그리고 불과 바람으로 흩어진다는 지수화풍 사상. 지수화풍의 정수는 대장간에 있다. 땅에서 나온 쇠(지)와 쇠를 달구는 화덕(화)과 불을 일으키는 풀무(풍)와 쇠를 식히는 물(수).

 

 

상주시 유일의 대장간인 북문농기구제작소에는 쇠를 52여 년 간 다루어 온 마지막 대장장이 홍영두 님이 있다. 속칭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 조금 못 미쳐 있는 대장간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안에서 들려오는 고저장단의 메질 소리에 메잡이의 불끈 솟은 근육과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떠올린다. 안을 들여다보면 배화교도 마냥 화덕의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홍영두 님과 메잡이로 아버지 뒤를 이어 대장장이 노릇을 배우는 큰 아들 홍경표 님을 볼 수 있다.

 

 

홍 대표는 해방 후 어지럽던 정국을 반영하듯 상주 왕산 앞의 적산여관에서 태어났는데 그 여관에는 당시 40여 호가 살았다고 한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도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가 있고 근엄해도 속으로 따뜻한 애정이 있는 아버지가 있으면 행복한 법. 그때를 생각하는 홍 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살포시 서린다. 행복했던 기억도 상주초등학교를 다니던 6학 때 끝나버린다.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가장 없는 집안의 형편이야 뻔하지 않는가. 홍 대표는 당시 간판 없이 대장간을 운영하던 숙부 밑에서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하고 불 피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 그리고 수도 없는 허드렛일들.

 

 

장인정신은 담금질로 정신을 단련하고 끊임없는 반복으로 육체를 단련하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마음가짐이 바로 잡혀야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고 배우는 위에 더하여 그 기술을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전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축적된 기술력이야 압축해 배우면 짧은 기간에 마무리 할 수 있다. 학교에서 공부 뿐 아니라 덕과 체와 협동심 등을 가르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숙부 밑이지만 나름대로 서열이 있는 장이들의 세계에서는 사장 조카라고 별다른 혜택이 있을 수 없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나이 든 늙은이도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이 장인 세계의 불문율이다. 곁에서 눈썰미로 일을 배우고 허드렛일을 해주기 어언 3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났다. 의용소방대원으로 일을 하던 숙부가 차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쳤다.

 

 

대장간을 더 이상 경영할 수 없었던 숙부는 홍 대표에게 풍양의 사촌형 대장간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했다. 몸은 젊고 장래에 대한 조바심은 나고 일을 잘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던 홍 대표는 몇 개월 만에 자리를 박차고 풍양으로 대구로 떠돌았다. 오라는 곳은 많았다.

 

 

 

그리고 25살 되던 1972년, 다시 돌아 온 고향의 숙부 대장간. 숙부는 먼지 끼고 녹 쓴 기구를 어루만지던 홍 대표에게 대장간을 인수하라고 했다. 기구라고 해봐야 모루, 망치, 메, 집게, 화덕, 물통 등 몇 가지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허름한 영신농기구 간판 하나. 숙부 집 한 칸을 차지하고 한 달에 쌀 한 가마를 팔아주기로 하고 그 제안을 받아 들였다. 난생 처음 경영하는 내 기업. 

 

   

 

독립 당시 상주에는 대장간이 8곳이 있었다. 홍 대표는 일꾼 예 일곱과 함께 집게로 집고 망치를 두드리며 메질을 신명나게 해댔다. 도시에서 보고 들은 풍월이 있어 기계화의 필요를 느껴 장비도 구입했다. 기술력 좋고 생산량 많으니 상주의 대장간 물건 가격은 영신농기구가 좌지우지했다. 삽에 곡괭이, 칼, 호미, 돼지 잡는 칼, 논매기 호미 등 만들기만 하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돈 좀 만졌겠다고 하니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사람 손으로 만드는 것, 큰 돈 안됐다”고 한다.   

 

 

인간사 영원한 것이 있을쏘냐. 농기구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영신농기구는 농업기계화의 영향과 소음으로 인한 이웃들의 항의로 아리랑고개 산 주변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 이름도 ‘북문농기구 제작소’로 바꾸게 된다. 옛날에는 논매기 호미만 한 달 동안 만들어도 수요에 맞추기 벅찼던 것이 제초제가 나와 논매기 호미 수요가 뚝 떨어졌다. 풀을 베던 낫은 예취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몇 년 하다가 고객이 멀어 불편하다고 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IMF 이후 중국산 제품이 무한정 들어왔다.

 

 

그래도 쇠를 한 번만 열처리 해 보면 그 쇠의 성질을 알고 탄을 보면 그 특성이 재빨리 파악되고 화덕을 지그시 바라보고 온도계보다 더 정확하게 온도를 짚어내는 홍 대표의 명성은 인근 지역에 자자해 진터. 대장간 전체에 대한 주문 수량은 줄어도 그 물량은 북문농기구 제작소로 왔다.

 

 

최고의 제품을 고집하는 홍 대표지만 여태껏 대장간을 운영하는 것은 고객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낯 선 제품을 가져오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을 고생하는 수도 있었고 북문농기구제작소가 만든 제품을 사용하다 불만이 있는 고객에게는 사용법을 알려주거나 제품의 제작 방법을 달리 하기도 했다. 돌 깨는 해머는 사용하다 문제가 생기면 전부 교환해주니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못 할 일이다. 홍 대표는 중국산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본인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여 생산하는 모든 제품에 일종의 낙인을 찍는다. 전국 200 여 군데의 거래처가 북문농기구제작소의 신뢰도를 말해준다. 영업하는 둘째 아들 홍성표가 거래처로부터 품질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아버지의 장인 정신에 어깨가 들썩인다.

   

 

소재 값은 올라도 제품 가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여서 고된 일에 적은 월급을 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대장간 일꾼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애로다. 아내 이필희도 대장간 일을 거들게 된 연유다. 밀물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산 제품이야 품질로 앞세우면 두려울 것이 없지만.

 

홍 대표는 쇠를 다루면서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을 깨우쳤다. 쇠란 강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무르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 제각기 쓰임새가 있다. 때로는 강하면서도 무른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제각각 용도에 맞는 쇠를 만들기 위해 담금질하고 벼리며 두드리고 쇠를 두드려 붙여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쇠 제품을 만들어도 사용하는 사람이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제품 또한 가치 없는 물건으로 전락하고 만단다. 인재도 자리에 따라 유(柔)한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고 강(强)한 사람이 없으면 안 될 때가 있고 유(柔)하고도 강(强)한 사람이 있어야 될 때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않으면 조그만 시골에서 방통이 술만 마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하는 홍 대표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