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멋쟁이 양복 인생 56년

맛깔 2011. 7. 27. 14:41

인간에게 필요한 3가지 요소가 의식주라고 하는데 궁금한 점이 인다. 3가지 요소 중 의복인 가 맨 앞에 언급되었을까?

생각은 말을 규정짓고 말은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 옷인 셈이다.

아마 의복을 가장 중요하게 말한 것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었나 싶다.

 

 

 

의복과 먹거리의 중요도는 상황에 따라 변할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음식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식음을 전폐한다는 것은 먹거리가 생명과 관계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옷이 날개라는

말은 모양이나 치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존에는 먹거리가 으뜸이고 먹고 살 만하면 의복이 필요한 것이다.

 

상주시 풍물거리 시장에서 맞춤양복점, 국제라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장복 사장(69)1인 기업이다. 한때 호시절에는

직원 몇 사람과 함께 일했지만 기성복이 대중화되고 인건비가 비싼 요즘에는 직원들을 데리고 일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일거리가 줄었거니와 직원들 구하기도 어려운 탓이다.

 

 

소년 이장복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시대의 또래들처럼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제일라사, 하르빈양복점,

독립양복점 등 4개 양복점이 모여 만든 합동양복점에 취직을 했다. 이 양복점은 일하는 사람들이 약 20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 당시로는 드물게 점촌에도 분점을 냈다. 4개 양복점 주인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과 고객감소를 우려하여 4개 양복점을 합병하였으니 이들은 반세기 전, 시골 상주에서 인수 합병의

경영 원리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아마 이 양복점의 주인들이 이론에도 밝았더라면 오늘날 경영학의 대가가 되지 않았을까.

자동차의 포드는 학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생산라인에 적용했던 분업 생산은 오늘날 경영학의

기본으로 수 십 년 동안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다. 아까울씨고 양복점 주인들의 경영마인드여.

 

 

 

양복점의 일꾼은 윗도리와 바지를 만드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소년 이장복은 일을 빨리 배울 요량으로 바지를 만들었다.

배우기가 윗도리보다 쉽다고 한들 멋진 신사로 만드는 기술인데 그냥 배울 수 있겠는가? 눈물과 고통과 노력없이

이룰 수 없는 것은 없다. 퇴근 후 남몰래 가게에 들어가 재단과 가위질을 연습했다. 선배들이 있으면 결코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점촌 분점에 근무하던 소년은 아침에 출근하면 청소하고 다리미용 숯불을 피웠다. 열과 성을 다하여 숯불을 피웠건만

기술자로 불리던 선배들이 트집을 잡아 숯불을 물에 담가 꺼뜨리는 수가 있었다. 소년은 설움의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부모생각, 친구 생각을 하며 불을 피웠다. 일이 없으면 기술자들은 아침부터 술집으로 가, 술을 마셨다. 주인은 배짱 좋은

기술자들을 찾아오라 성화였다. 소년은 무거운 마음으로 술집에 가면 기술자들은 주인에게 가불을 해 오라고 해

다시 주인에게 가 돈을 찾아 갖다 주었다. 그 시대의 인간 군상이었다. 1년 정도 일을 하다 혼자서도 바지를

만들 정도의 기술을 배웠다 싶었을 때 문경 가은의 양복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의 불합리한 제도를 알아야 일 배우는 직원들이 왜 자주 옮겨 다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배우는

직원들은 월급은 커녕 점심과 용돈도 못 받았다. 다른 가게로 옮겨야 기술자 대접을 받고 돈을 벌 수 있는데 양복점에서는

재단사만이 월급을 받았고 나머지 직원들은 양복 한 벌, 윗도리, 바지 한 개 만드는데 대한 수당이 있었다.

갓 청년기를 들어 선 이장복이 문경 가은에 가서야 비로소 돈을 만졌다. 그때 돈 좀 벌었는지 물어보니 활짝 웃으며

탄광은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고 했다. 한 일 년 있다 대구로 갔는데 초등학교 밖에 마치지 못해 공부가 하고 싶었다고.

 

 

 

새벽에 대구역에 내리니까 날은 춥고 배는 고파 우거지 상을 하고 있는데 우연히 만난 아저씨가 나이와

처지를 물어보더니 집으로 데리고 가 꽁보리밥을 고봉으로 줬다. 그 사람 아들이 객지에서 이장복 군의

처지와 비슷해 아들 맞잡이로 대접한 셈이다. 이 사장은 이때의 기억으로 남을 도우면서 살려고 한다.

이름 모를 아저씨의 도움으로 명시당 시계점 옆 양복점에서 일을 하다 서울에 가면 무엇인가 되겠다는

생각에 간출한 짐을 쌌다. 대구 있던 양복점의 재단대에서 잠자고 배불리 밥은 못 먹었지만

통신강의록으로 공부를 하면서 내공을 키웠다.

 

기성복이 없을 때라 기술자들의 성가는 높았다. 통신망이 잘 갖춰지지 않았을 때지만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고 기술자들은 가위 하나만 들고 전국을 떠돌았다. 명동 양복점에서

일을 할 때 옷 한 벌을 지으면 주인으로부터 전표를 받았다. 기술자들은 이 전표를 바꿔 밥 먹고

자장면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때 충무로는 가난한 영화인들의 천국이었다. 당시 마산에서 갓 올라 온

스타지망생 이대엽의 소개로 마산까지 내려가 옷을 맞추어 준 기억도 있다.

양복점 직원들은 직장의 특성상 멋진 양복 한 벌씩은 있었다. 쫙 빼입고 나가면 젊은 아가씨들의 눈요기 감이었다.

그때는 보통 물들인 까만 군복을 입고 다니고 시골에서는 선보러 갈 때 양복을 빌려 입고 갔었다. 이장복의 황금시대였다.

 

 

 

능력 있다는 소문이 돌아 충주에서 재단사 일을 하게 됐다. 재단대 뒤에서 밥 먹고 돌아서 손님을 맞을 정도로

일이 많았다. 부천 국제라사의 재단사를 끝으로 양복점 직원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에서 한 이년 낮에는 영업을

다니고 밤에는 양복 일을 했다. 수구초심. 이제는 양복점을 개업할 돈을 모았고 고향도 그리웠다.

상주로 와 신성양복점을 인수하고 국제라사로 이름을 바꿔 경영자로 돌아섰다. 2-3년 서울의 기술자가 와

양복일을 한다는 소문에 제법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모았으면 부자소리 들었겠다고 하니까 딸 둘, 아들 하나 교육시키고 시집보낸다고 힘들었다고 한다.

양복점에서 함께 일을 하는 아내 김경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림없었을 거라며 아내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