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때 빼고 광 내고 구김살 펴는 인생

맛깔 2011. 7. 10. 11:00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이름이 아니다’는 이름으로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허나 사람들은 이름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려고 한다. 하여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세탁소는 빨래를 해 주는 곳이라는 뜻이고 빨래는 더러운 옷이나 피륙을 빠는 것이다. 세탁소는 빨래와 함께 다림질도 해주는 곳인데 ‘세탁소’라고 하였으니 세탁소의 업무를 축소하였다. 그 이름을 잘못 지었던지 아님 옛날에는 빨래만 해 주던 곳이라 그렇게 불렀을 것 이다. 이름이 세탁소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 못 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상서문세탁소 주인은 간단한 수선도 하니 세탁소의 명칭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상서문세탁소 (상주시 남성동 전화 054-535-4120)  김영무 사장은 1940년 생으로 19살에 세탁 일을 배워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올해로 52년 세탁경력을 지니고 있다. 고향 상주 부원에서 상주북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산중학교 1학년 때 중퇴했다. 가슴 아프지만 시대의 사정으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 할머니, 부모님, 4남매 등 일곱 사람의 생계가 논 3마지기, 밭 3마지기에 매달려 있었고 농사에 필수적인 황소는 없었다. 가족의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는 말이다. 논 3마지기, 밭 3마지기의 소출은 년에 쌀 6가마, 보리쌀 4가만데 이것으로 일곱 식구가 먹고 살고 4남매가 학교를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비를 제때 못내 창피를 당했는데 남산 중 1학년 학기 첫 시간에도 학비를 못 냈다고 교실에서 공부하는 대신 교무실에서 벌을 받았다. 어린 시절,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도 하기 싫은 게 공부인데 이런 욕을 당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컸겠는가? 선생님 몰래 학교를 빠져 나와 다음 날부터 등교하지 않고 집에서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학교에 가라고 하지 않았냐고요? ‘의식이 자족해야 예절을 알고’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먹고 사는 게 급했다.

  

남의 집에 놉일 해주고 소를 빌려와 논밭을 갈았다. 가뭄에는 물곬에서 물을 퍼 논에 날랐으니 힘이 들었다. 농사일 해 보셨는지? 농사일은 집안 살림과 같아 하려고 들면 한도 끝도 없고 대충 하려면 또 그냥 넘어 갈 수 있다. 열 대 여섯 먹는 아이가 농사에 재미가 있겠는가? 가래질은 건성건성 쟁기질은 그냥그냥 써레질은 힘에 겹고 피 뽑기는 대충대충 청소년의 열기는 울렁울렁

  

할머니가 비료를 사오라고 준 돈 천 원을 들고 집을 나왔다. 기차에 무임승차하여 인천 있는 사촌 매형 집에 가다가 열차 차장에게 잡혀 역 대합실 청소를 했다. 이런 고난을 거쳐 사촌 매형 집에 도착하였다. 사촌 누나가 거지같은 몰골로 온 동생을 보고 기가 막혀 하며 며칠 재우면서 잘 먹여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라면서 사촌 자형이 신던 구두와 천원에 당시로는 아주 귀한 계란 다섯 개를 삶아 줬다. 소년의 가출 사건은 집에 돌아오면서 잊혀 졌고 영무는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온가족이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매달려 살기에는 너무 고달파 끊임없이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합동양복점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적성에 안 맞아 19살에 백양세탁소의 이경재 사장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 당시는 애벌 손빨래를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했는데 세탁기는 발동기에 피대를 걸어 돌렸다. 옛날 방앗간에서 떡 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연탄불에 다리미를 달궜다가 다리미가 까매지면 연탄재로 닦고 다림질을 하였다. 석유로 드라이를 해 옷에 석유냄새가 많이 나던 시절이 지나고, 1963년 드라이기계가 나왔다. 없을 때 보다 편했지만 요새 기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드라이를 하다보면 때가 석유에 가득 찬다. 그러면 약품으로 때를 불에 태워 석유를 재사용했다. 궁하여 통했을 것이다.

  

세탁은 중요도에 비해 고객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세탁비도 아주 싼 편이다. 요새 명품 브랜드 의류 가격이 백만 원을 넘어가는 것이 많은데 세탁 한 번 잘못하면 무용지물이다. 김 사장은 일찌감치 세탁 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기술 습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다리미 두 개 사용과 줄어 든 모직물 펴기 외에 가죽 세탁, 한복 세탁 등에 탁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평택 문씨라고 알려진 사람으로부터 가죽에 색 입히는 기술을 배웠는데 공기 압축기로 색소를 품어내는 방법이 핵심이었다.  가죽세탁은 물로 세탁한 다음 딱딱해진 가죽에 기름을 발라 스팀다리미로 다리고 유연제와 색소를 써야 되는데 이 또한 통달했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젊은 시절 거품이 넘치지 않게 맥주를 따르는 것이 부러웠다. 아무리 해도 배울 수 없는 술집 도우미들의 솜씨에 탄복을 하며 그 비결을 물었더니 “자주 해 보면 된다.”였다. 여기서 잠깐, 혹 필자의 사생활에 의혹을 가질 독자들에게 한마디. “전, 그렇게 난잡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주로 친구들과 함께 갔습니다.” 노력이 완벽한 기술을 탄생시킨다는 얘기를 복잡하게 했다.

  

한복 세탁이 쉬운 줄 아는가? 드라이기기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한복 세탁을 잘 할 수 있다. 한복 기름으로 때를 처리한 후 드라이기에 5분 정도 돌려야 된다. 실크 광택이 죽지 않고 실크 넥타이를 세탁하는 방법도 있다. 되도록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세탁해야 천연의 모습이 살아 있다는 것을 경험상 얻게 됐다. 당분과 염분이 묻으면 드라이가 잘 안되며 물세탁으로 줄어든 모직은 수성으로 세탁 후 스팀을 쐬며 잘 다리면 5~8센티 정도 늘어난다고 한다. 필자의 등산모와 스웨터가 최신 기술로 되살아났다.

  

이 모든 세탁기술은 섬유의 종류에 따라 적용할 방법이 다르니 기술의 바탕은 섬유에 있다. 같은 약품이라도 섬유의 종류에 따라 때가 빠지고 안 빠지니 섬유 종류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신경을 써도 몇 년에 한 번씩 소비자보호센터의 중재를 받아야 되니 항상 신경이 곤두 설 일이다.

  

김 사장은 국내에서 일반 다리미, 스팀다리미 두 대로 다림질을 한다고 자랑한다. 제대로 된 스팀다리미가 나온 83년부터였는데 두 대를 사용하면 시간 단축과 각 잡힌 모습이 선연하다고 한다. 세탁소 다리미 판 밑에는 스펀지와 스팀을 뽑아내는 환풍기가 있는데 스팀을 품으면 스펀지로 인해 스팀이 다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면 옷에 습기가 남아 있어 확 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리미 두 대를 사용하여 스팀다리미가 지나 간 자리를 곧이어 일반다리미로 다리면 그런 것이 없어진다. 손의 감각을 머리로 터득해야 할 기술이다. 다림질에도 나름대로의 도가 있다. 노력 없이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세탁의 도를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함창 백양세탁소에 있을 때는 세탁물을 메고 100미터 떨어진 우물에 가서 세탁을 하였다니 ‘세탁하는 저 총각 때문에 가슴 설렜던 처자들도 많았겠다. 미남이라는 말씀. 다시 백운세탁소로 와서 일을 하였는데 당시 주인은 은척면 부면장을 퇴직한 이항우 님이었다. 이 세탁소를 한전을 퇴직한 김진갑 님이 인수하였는데 당시 상주시내에는 세탁소가 7~8 군데 밖에 없어 제법 돈이 됐다고 한다. 김 사장은 세탁 일을 잘 몰라 운영에 애착이 없던 주인에게 사정하여 가게를 인수했다. 그리고 69년 현 명성의류 자리에 시민세탁소를 개업하고 한동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호사를 누렸다.

  

잘 나가던 세탁소는 화재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 1977년 다리미 과열로 세 들어 있던 목조건물이 홀랑 타버렸다. 2 천만 원의 손실을 입고 잠시 국가에서 주는 밥도 먹었다. 아내와 자녀 셋을 데리고 아버지와 합쳤는데 뜻이 안 맞아 자주 다투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자식의 어려움이 딱해 보였던 아버지가 안타까운 심정 때문에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는 사람에게 백만 원을 빌려 다시 세탁소를 차려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한 동안 운영을 잘 했다. 집은 세월 지나 다시 지어줬고 고객이 맡긴 옷은 몇 년에 걸쳐 보상을 해 주었다. 딱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고객들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은 일에 마가 낀다고 드라이클리닝에 좋다는 항공유를 조금 얻어 사용하였는데 스파크가 유증기에 튀어 또 화재가 났다. 처음 화재가 나고 5년 뒤의 일이다. 세든 집 다시 짓고 고객 옷 물어주고 세탁 공짜로 해주며 한 오년 열심히 일해서 현재의 집을 구입했다. 시련이 없는 사람이 행운아가 아니라 시련을 이기는 사람이 행운아다. 그 뒤로는 별탈없이 오늘까지 잘 살아오고 있다.

  

김 사장은 항상 아내가 고맙다. 애교 없는 과묵한 아내는 “나보다 남편이 더 잘하니까”라는 한 마디만 할 뿐이다. 이 아내 덕에 삼남매를 키워 다 시집 장가보냈으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배달하는 대규모 세탁소가 번창하는 요즘에도 배달 않는 상서문세탁소에 고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니 기술의 경쟁력 때문일 것이다. 청리, 공검, 능암, 화령, 화령에서 오는 단골 고객들도 있다. 1시간 걸려 세탁하러 오는 고객도 대단하고 이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김 사장의 브랜드 가치도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