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김성희 이발사의 66년 머리깎이(1)

맛깔 2011. 6. 16. 09:14

 글 하춘도 / 사진 강석환

 

이발사란 직업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말까지는 없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유교가 국가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하여 불효하지 않으려면 머리카락 한 오라기라도 소중히 간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길렀는데 어려서는 댕기를 땄고 어른이 되면 상투를 틀었다. 

 

 

고종황제는 1895년 단발령을 내려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였으나 많은 선비들이 “내 목을 칠지언정 내 머리를 깎을 수는 없다.”고 하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더구나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으로 일본을 증오하는 백성들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어 결국 단발령을 지시하였던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2년 후 광무개혁으로 마침내 단발령도 폐지되었다. 머리를 바싹 깎은 사람들을 일제 시대 와서야 볼 수 있었으니 이발사란 직업이 생긴 지는

오래야 100년 이쪽 저쪽이 아닌가 싶다.

 

 

상주경찰서 맞은 편에서 우방아파트 쪽으로 조금가다 이화식당을 끼고 골목길을 따라 100미터 쯤 가면 신성이용소가 있다. 이곳에는 조그만 키에

다부지게 생긴 이발사가 있는데 그는 나이에 비해 아주 건강해 보이는 여든 두 살의 김성희 옹이다.

 

 

“그러니까 내가 16살 때부터 이발일을 배웠으니 올 해로 만 66년째 가 되지. 상주에서 내가 제일 오래 되었어. 1945년

상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1회 졸업생에 졸업장도 1번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제일은행 옆에 있던 상산이용소의

주인 강석희 옹을 찾아가 머리 깎는 기술을 배우게 해 달라고 매달렸어.” 당시에는 이발사가 돈을 잘 버는 꽤 좋은 직업이라

이발일을 하려면 알음알음을 통해 이발소 주인에게 청탁을 해야만 되었다고 한다. 월급은 없고 밥 한 끼도 주지 않을 때였고

상주에는 이발소가 몇 군데 밖에 없었다. 2010년 말 현재 상주의 이발소는 40 여 군데가 된다. 

 

 

요즘이야 이발을 배우는 학원이 있어 체계적으로 배우지만 당시에는 처음 이발소에 들어가서 거울, 유리를 닦고 바닥청소를 하면서 곁눈질로

이발 기술을 배웠다. 의자는 목공소에서 나무로 제작하였다. 출근하면 면도칼을 숯돌에 갈고 사용하다 무뎌지면 임시로 가죽에 갈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칼에 묻은 기름을 가죽으로 닦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서부영화를 보면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청소하고 유리 등을 닦는 허드레 일을 거쳐 머리를 감기다가 면도를 하고 바리캉을 잡고 가위로 손님 머리를 깎는 것이 일을 배우는 순서였다.

주인 친구들, 일 배우는 이발사의 친구들, 친척들의 머리와 수염이 숱한 고난을 당했다. 무료라는 미명하에.

 

 

 

원래 기술을 전수하는 장인들의 서열과 군기는 엄격하다. 아무리 잘 할 것 같아도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칼과 바리캉을 만질 수 없는데 그는

눈썰미가 있었는지 들어간 지 2개월 만에 처음으로 손님에게 면도를 해 주었다. 점차 세월이 가면서 바리캉을 사용하고 가위로 손님 머리를

매만지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칼과 바리캉을 들던 날의 기쁨을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의 아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여자애는 단발이고 남자들은 빡빡 깎았다. 요즘에는 거꾸로 남자들도 미장원에서

머리를 만지니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이치가 여기에도 통용되는 모양이다. 한 이년을 배우다가 누구 못지않게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기자

서울에 있는 이발소에 정식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1951년부터 미군부대에서 이발사로 3년을 근무하고 1954년 한국군에 입대하여 1958년도에 제대하였다. 제대 후 전국을 돌아다녔다. 가위하나

들고 다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하나를 버팀목삼아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1958년 이용사면허증을 땄으니 면허증의 연륜이 불혹이다.

면허증이 있어야 개업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1963년부터 상주농잠학교 구내이발소를 5년 동안 운영하였다고 한다. 70년대에 한 몇 년간 남양군도의 팔라우에 토목기술자로 외도한 것을 빼면

지금까지 가위를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다. 장발단속이 심했던 1970년대의 이발소경기가 최고였다. 4-5명의 직원을 두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눈을 지긋이 감는 모습이 그 시절을 아쉬워하는 것 같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손님들도 동년배가 주로 와. 쑥을 캐, 판 돈이 조금 모자란다고 미안해 하며 머리를 내미는 손님들도 있지만 내가 이 나이에

돈을 바라겠어. 사람이 찾아오는 것만 해도 행복하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기운이 나지.” 김성희 이발사를 찾는

손님들은 가까이는 시내에서부터 멀리는 사벌, 은척, 화북, 외남에까지 이른다. 신성이용소는 상주 어르신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알려지고

있으니 어르신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매번 오는 손님들이 발길을 끊으면 한참 후 그 손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고 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고 손자들 용돈 줄 정도의 수입은 된다며 노 이발사 김성희 님은 환한 웃음을 짓는다. 제대로 된 기술 하나가 어설픈

학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