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아픈 자 두드릴 지니, 성재윤 약사의 50년 약국 경영

맛깔 2011. 8. 2. 16:15

 

율곡이이의 부친 이원수가 돌아가시자 그 자녀들이 모여 부친의 재산을 분배하는 기록이 있다. 이를 재산을 나누는 기록이라 하여 분재기라고 부르는데 재산 분배의 기준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남녀 차별 없이 공평하게 재산을 나누었는데 임진왜란 후에는 주로 장자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었다.

 

 

임란으로 피폐해진 농토와 노비의 사라짐으로 인해 남겨 줄 재산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장자가 제사를 올리는 조건으로 장자에게 재산이 상속되었으리라는 짐작이다. 장자는 재산을 상속받는 권리를 얻는 대신, 부모 공양과 제사를 지내는 의무를 지녔다. 이 전통은 죽 이어 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장자들은 부모 모시고 동생 공부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풍물시장 안의 제일약국 성재윤 약사(74세)는 그런 시대의 장남으로 형제는 장장 9남매나 되었다. 가는 것은 세월이요 오는 것은 백발이라더니 약대에 진학한지가 벌써 55년이 되었고 약사 면허증을 받은 지 50년 넘었다. 성 약사가 세월을 뒤돌아보니 엊그제 같다면서 지나 온 시절을 얘기해 준다.

 

 

성 약사의 부친은 공무원이었다. 집에 논, 밭 조금 있고 소 한 두 마리 키웠는데 상주초등학교, 농잠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부친의 급여가 제때 나오지 않고 몇 달씩 밀려서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소는 농부에게 임대 주고 논 밭 갈 때 데려 왔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농부가 찾아 갔다. 새끼 놓으면 소 키우는 대가로 농부에게 주었다. 집에 소가 있을 때는 성 약사가 망태지고 소꼴을 뜯으러 다녔다.

 

 

양친은 공부 잘하던 모범생 성 약사에게 끊임없이 집안의 내력을 얘기해 주며 동생들 잘 보살피고 집안을 일으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가족 부양에 대한 의무감이 항상 성 약사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였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 대학 들어 갈 무렵, 취업 걱정 없고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던 약대가 당연히 선호 1순위였다.

 

 

1955년 영남대에서 처음으로 약대를 신설하고 신입생을 뽑았는데 공부 좀 한다고 영남대 약대를 지원했던 성재윤은 기가 팍 죽었다. 경쟁률이 보통 다른 과는 3 ~ 4대 1이었던 것에 비해 약대는 무려 30대 1이나 되었던 것이었다. 시험 치고 걱정이 태산 같았던 성재윤은 합격자 발표 당일, 떨어졌다 생각하고 합격자 게시판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집에서 걱정만 하고 있었다. 친구가 다녀와서 성재윤에게 합격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때부터 합격자 성재윤은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지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왔다.

 

 

성재윤은 하숙하고 자취하며 어렵게 대학 4년을 마쳤다. 졸업 하던 해, 입대하여 1군 사령부 예하부대 의무대에서 만 3년을 근무하였다. 제대 후, 지금의 제일약국 맞은 편에 있던 문진지업사 자리에서 약국 개업을 했다. 한 2~3년 열심히 하여 당시 최고의 상권으로 꼽히던 지금의 자리로 약국을 이전해 확장 개업했다. 성 약사는 약국 판매가 거의 두 배가 되었다고 기쁨에 떨며 말하던 아내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당시 의료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부터는 점차 약국업무에 대한 체계가 잡혀 약사는 고유의 업무만 하게 되었는데 조제와 처방은 약사 고유의 업무였다. 정확한 조제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는데 원래 성실한 성품에다가 대학 입학 때의 기억을 되살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 무렵, 성 약사는 상주가 고향으로 점촌에서 자랐던 점촌초등학교 이연자 선생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결혼하면서 성 약사는 아리따운 이연자 선생에게 약국에 사람이 필요하니 학교를 그만 두라고 부탁했고 이연자 선생은 약국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편해 보여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 당시 약사들의 근무시간은 아침 해 뜰 때부터 밤 11, 12시 까지였고 일 년에 쉬는 날도 명절 이틀 사흘 정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약국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아 놓으면 새벽이고 밤이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이연자 선생은 얼핏 보기에는 약사부인으로 편하게 보였겠지만 아이들 키우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일 도우러 왔던 아주머니가 저의 일보다 더 힘들다고 했을까.

 

남들 보기에는 편해 보이는 약국 경영에도 애환이 많단다. 그 첫째가 항상 문을 열어 놓는 어려움이다. 냉난방을 위해 약국 문을 닫아 놓으면 눈 어두운 노인들이 약국 영업을 안 하는 줄 알고 그냥 간다고 한다. 한 겨울에 약 조제할 때 한겨울 냉골이 약국을 치고 들어와, 손가락 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거의 다 외상으로 약을 구입해 갔는데 많은 금액이 미상환이었다. 빌려 오면 돌려 줘야 되고 빌려 가면 돌려받아야 되는 습관이 몸에 배고 그것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지난날의 하소연이다. 그리고 하루도 쉴 날이 없는 것도 큰 어려움이었다.

 

이제 의약분업 때문에 많은 약국들이 병원 근처에서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성 약사는 결코 그 곁으로 갈 생각이 없다. 의약분업 초기에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오래 된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 와 삶의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좋고 의약분업으로 약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이 약국 경영에도 좋지 않고 일부러 찾아오는 고객들에게도 불편하다고 한다.

 

이사 올 때 만든 50년 된 책장을 지금도 깨끗하게 쓰는 알뜰습관도 있었겠지만 지역 사회 덕분에 동생들 뒷바라지 하며 자식 잘 키웠고 그런대로 약국 경영을 잘 해왔던 노 약사의 소망은 소박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객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고객들로부터 삶의 보람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