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제일양화점의 신발 만들기 66년

맛깔 2011. 9. 17. 08:40

양근수 님의 66년 제화 인생  

 

구한말 경허스님은 짚신을 삼아 길목에 걸어 두었다. 지나던 나그네는 짚신 두 짝을 괴나리봇짐에 묶고 발걸음 가볍게 가던 길을 이어 갔다. 아마 대덕은 중생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날 때 행장을 꾸려 신발을 동여매고 갔으니 ‘가자 가자 더 높이 가자 영원한 깨달음의 길로’가는 듯한 중생에게 도움을 주는 마음이었으리라.

 

 

양화인 서양식 구두는 양복을 입던 구한말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됐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와 짚신 그리고 가죽신, 목혜라 불리던 나막신 등을 신었다. 백성들은 미투리라 불리던 짚신을 주로 신었다. 남문시장의 제일양화점 양근수 사장(81세)의 부친 고 양필주 옹은 미투리를 삼아 생계를 이어갔다. 양 사장이 제화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부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신발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물품이라 짚신을 받은 사람들은 양 서방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것이고 근수 아들은 이 광경을 숱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이왕 사는 것, 악다구니 하며 사는 것보다 좋지 않은가.

   

양 사장은 상주초등학교 1회 출신으로 해방 무렵 졸업했다. 일본 압제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사는 것은 힘들었다. 이런 시대 상황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을 취업 전선으로 내 몬다. 밥벌이가 전쟁이다.

 

 

양 사장은 양화점에 취직해 상주 시내와 화령, 점촌의 양화점 몇 군데를 다니다가 상주경찰서 부근의 영광양화점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6.25 후 자유양화점에 터전을 잡았다. 영광양화점에서 일할 때. 그의 착실한 모습을 지켜 본 주인이 양 총각을 결혼시키기 위해 중매를 섰다. 사람이 착실해 인연을 맺어 주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성실하고 재주 좋은 직원을 오래 동안 붙잡아 둘 요량도 있었을 것 같다. 말하자면 남자들은 장가가서 아이 낳고 살다보면 한 직장에서 꼼짝달싹 못한다는 그런 얘기다.

 

 

아내 이복란 여사(78세)는 지금도 곱지만 그 때는 참 예뻤다고 한다. 총각 양근수의 건강이 안 좋아 보여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친정 아버지는 잘 생긴 얼굴에 성실해 보이는 미래의 사위가 듬직해 보여 결혼을 적극 권유했다. 결혼 배우자를 구할 때 친정아버지의 말이 법이던 시대다. 이복란 여사에게 좋은 신랑하고 살았는지 물어보니 양 사장은 옆에서 허허 웃고 이복란 여사는 대답을 머뭇머뭇한다. 결혼 점수를 많이 못 딴 편이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 아내 크산티페를 비롯해 동서고금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3남 3녀를 키워 모두 대학에 보냈는데 그 중에 선생님이 있고 시청 공무원도 있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높은 자리에 있는 아들도 있다고 하니 자녀 교육을 잘 시킨 것 같다. 그러면 두 분이 잘 살아 오신 것일 게다.

 

 

구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밑창과 위쪽 부분 가피다. 가죽이 서로 닿는 부분은 너무 두꺼워 지니까 안쪽을 칼로 벗겨내야 모양새 있게 붙는다. 그때는 못이 귀했다. 가피를 밑창에 대려면 접착제로 바르고 못을 쳐야 하는데 쇠못이 어디 있는가? 물자가 귀할 때다. 궁하면 통한다고 대나무체 테두리를 잘게 잘라 못으로 사용했는데 가죽은 송곳으로 뚫어 그 위에 대나무 못을 넣고 박았다.

 

 

접착제는? 처음에는 찹쌀 풀을 쒀 발랐는데 나중에 형편이 조금 나아져(?) 본드를 만들어 썼다. 생고무를 휘발유에 녹이면 본드가 된다. 재단하는 거 집중하고, 본드 바르는 것 신경 쓰고, 못 치는 것, 구두 닦는 것 조심해야 하니 혼자서 구두 한 켤레 온전히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데 4년이 걸렸다. 혼란한 시대였고 없이 살았지만 생필품이 모자라 구두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사촌 형과 잠시 동업을 하다가 홀로 독립을 했다. 가게도 없었는데 동생이 영업을 잘 해 장사는 아주 잘 되는 편이었다. 어느 정도 자본을 모아 가게를 현재의 자리에 얻었다. 그때가 1960년 무렵이었다.

 

 

1970~80년대는 황금시대였다. 기술자 1~2명, 견습생 4~5명을 두고 밤을 새워 일했다. 맞춤 구두가 요즘의 기성화처럼 많이 팔렸다. IMF 때는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버텨 나갔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힘차게 흔든다. 오히려 호황이었단다. 소비자들은 달러 부족으로 물가가 올라 갈 것을 예상하고 사재기를 엄청 했었다. 구두 제품은 물론 가죽과 부품이 재고로 남아 있을 틈이 없었다. 운 좋고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IMF 후로 맞춤구두도 맞춤 양복처럼 한 해가 다르게 점차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바쁜 사람들이 기성복과 기성 양화점에 와 곧 바로 사가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가 됐다. 부자나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맞춤 가게를 찾았다. 이미 만들어졌다는 기성은 옷과 구두를 몸에 맞추는 반면, 주문과 동시에 제품을 만드는 맞춤은 몸에 옷과 구두를 맞추는 것이다. 갓 지은 밥과 짓고 며칠 지난 밥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양 사장은 이제 나이가 들어, 자식들이 한사코 모시기 위해 양화점을 그만 두라고 해도 몇 십 년 단골고객들이 꾸준히 찾아오는 바람에 가게 문을 열어 놓고 있다고 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당나라 백장 선사의 말씀을 천성으로 깨달은 성실한 노동자의 삶은 제일양화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