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때우고 만들고 붙이고, 만물박사 신흥철공소 이화선 장인의 52년 기능인생

맛깔 2011. 10. 14. 09:09

요즘 젊은 세대들은 모르리라. 1970년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상을 탄 한국 선수들이 국내로 돌아 와 메달을 목에 걸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광경을. 또 시내를 거닐다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의 집’이란 현수막이 걸린 양복점에서 만족한 표정으로 양복을 입고 나오는 사장님들의 모습을.

 

 

정식명칭이 ‘국제직업훈련 경기대회’로 불리는 ‘국제기능 올림픽 대회’는 1950년 제 1회 국제대회가 열렸다. 한국은 제16회 대회 때부터 참가하였으며 제17, 19회 대회에서 종합성적 3위, 제21회, 22회 대회에서 2위, 1977년 제23회 대회에서 처음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한 이래 1991년 암스테르담 대회 1위까지 연속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으며 67년 이래 참가한 25번의 대회에서 16차례나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선수단은 2007년 일본 시즈오카 대회에 이어 지난 9월 7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막을 내린 2009년 제40회 캘커리 국제기능올림픽에서도 종합 우승을 차지해 한국인의 기능 솜씨를 세계만방에 빛냈다.

 

 

기능올림픽의 성과를 보면 한국인의 손재주를 따라올 나라가 없다. 세계 1위의 영예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좋은 자질의 인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장인정신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국을 폄훼하려는 음모론(?)의 일환이라 봐도 틀림없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는 것을 보고 감탄한다. 그 사람들로서는 거의 경이의 기술이라 탄복하는 것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면 손 주위에 몰려있는 수많은 근육이 발달하고 이 근육의 발달은 손재주를 좋게 하고 머리를 명석하게 한다고 한다.

 

 

이화선 신흥철공소 사장(71세)은 김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2살 때부터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아니 입 하나 더는 심정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다. 몇 군데 가게를 거쳐 철공소 일을 배우다 22살 때 상주로 왔는데 요새 말로 하면 우수인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호삥구라고, 기아에 이빨 내는 기술은 인근에서 그를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사장은 풍물시장거리의 농약판매상 부근에 있던 해청철공소에서 일을 하다가 옛 우시장인 소전거리에서 ‘신흥철공소’란 간판을 걸고 독립을 했다. 그 때가 30대 초 무렵이었다. 상주에는 철공소가 여남은 개 정도 있었다.

 

젊어 힘 좋겠다, 스카웃 될 정도의 기술 있었으니 이 사장과 한 번 거래를 텄던 사람들은 모두가 신흥철공소의 고객으로 줄을 섰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민족은 솜씨로 세계를 놀라게 한, 지금도 놀라게 하고 있는 재능이 있지 않은가. 이 사장은 선반, 용접기, 튼튼한 손발과 뜨거운 열정에 기계를 척 보면 작동원리가 머리에 들어오고 부품을 살펴보면 제작방법이 눈으로 입력되는 능력으로 별의 별 것을 다 만들었다고 한다. 탈곡기, 양수기, 국수틀, 쌀 찧는 기구 등. 하여튼 쇠로 만들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농사철에는 일꾼 일고여덟 명이 밤을 새워 일을 해도 제대로 공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거리가 많았다.

 

 

장인들은 대개 가슴 속 한 켠에 자부심과 열정을 묻어 두고 얼굴과 행동에는 겸손으로 그 재능을 가리고 있다. 이 사장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뭐 한 게 있어, 다 먹고 살자고 했던 일인데”라며 자랑할 만한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펌프 얘기를 꺼내자 눈빛이 달라지고 목소리에 자못 힘이 들어갔다.

 

 

“옛날 펌프는 마중물을 넣어 물을 퍼고 물이 없으면 펌프를 끄고 마중물 넣는 일부터 다시 했지. 그 일이 얼마나 불편한지 안 써 본 사람은 몰라. 그것을 내가 요모조모 따져 자동펌프를 만들었지. 물 없으면 저절로 꺼지고 물 있으면 자동으로 물을 퍼는 펌프가 얼마나 신기했던지. 많은 사람들이 탄복을 하며 사갔지. 특허, 그 때는 특허가 뭔지도 몰랐어. 아마 특허 받았다면 부자 됐겠지만. 사람들이 잘 사용하면 고맙지. 지금은 그런 것을 만들 힘이 없어 못해” 돈으로 보상을 받지 못했으니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 준 공덕만은 자손에게 갈 것이다. 이른바 적선지가에 필유유경의 원리 아닌가.

 

오후 4시 쯤 되니 참 먹으러 식당에 간다.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였던 옛날에는 감히 못할 일이지만 요즘에는 일거리가 가뭄에 콩 나듯이 있고 간혹 큰 일이 들어와도 마음을 다잡으면 금방 할 수 있어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이 사장이 소주 한 잔에 풋고추와 마른 멸치를 안주 삼아 일 배우던 옛날을 회상한다. “일 배울 때 군기가 셌어.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눈치껏 배워야 했지. 그러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맞고, 창고로 끌려가서도 맞았고 연장 하나 잃어버리면 밤을 새워서라도 찾아 놓고 퇴근해야 했어. 모두들 배곯고 못살 때라 악에 바친 행동들을 한 거야.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를 못하겠지. 우리는 그렇게 살았어” 인생의 종착역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노 기술자의 눈에 얼핏 눈물이 서렸다.

 

일 배울 당시에는 모든 것이 귀했지만 생산기반시설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애로였다. 생필품이야 없으면 덜 입고 덜 쓰면 되지만 장비가 없으면 생산품을 만들 수가 없으니 말이다. 모터가 귀해 정미소처럼 피댓줄을 걸어놓고 기계를 돌렸다고 하니 정밀성과 정확도가 떨어 질 것이 아닌가. 그래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정밀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우리 선배들은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기술을 배우고 일을 하면서 기능의 한국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낸 것이다.

 

요즘 일거리가 줄어 든 것은 옛날에는 용접 등 간단한 일도 철공소에서 했지만 요즘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어지간한 철공일은 집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또 요새는 좋은 규격품이 나와 기구와 부품을 제작하기 보다는 제품을 구입하고 고장 원인을 밝혀내며 부품을 교체하는 기술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어차피 시대의 추세에 따라 철공소 일은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철공 일을 할 인력이 배출되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일이 어렵고 험하다고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줄어들면 아주 간단한 철공 일 하나에도 많은 돈을 줘야 되거나 외국에서 인력을 수입해야 될 처지가 될지도 모를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