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람들의 한우물 인생

명창 이명희

맛깔 2012. 12. 4. 12:56

명창 이명희의 40년 소리 인생

 

 

(2009년 9월) 

 

“뭐여? 야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하나 이놈아.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은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더 좋은 것이 소리속판이여 이놈아” - 영화, 서편제 중에서

 

 

‘열린 귀는 들으리라’는 성경 말씀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귀가 열려야 들을 수 있다는 물리적 법칙을 얘기해 주는 것이 하나라면 귀가 열린 후에 마음도 열려야 듣고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그 둘째다. 어떤 일을 할 때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설명해 준다.

 

상주시 낙동면 상촌에서 태어 난 이명희 명창(65세)은 초등학교 1년을 마치고 대구로 갔다가 어머니를 따라 간 서울에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15세 되던 해, 우연히 시공관으로 명창들의 소리 공연을 구경하러 갔다. 인연이 있어 간 것이 아니라 심심하던 차에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도 나온다던 명창 공연을 친구와 함께 보러 간 것이다. 명창의 소리를 듣는 순간, 몸 속 어디에선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답답하게 막혀 있던 것을 펑 뚫어주는 것 같은 희열을 맛보았다. 어려운 생활형편, 무엇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 불투명한 미래 등이 명창의 소리로 녹아 내려서 그랬을 것이다.

 

 

소리를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고 더군다나 배운 적도 없는 이 명창은 누가 오라는 것도 아닌데 시공관에 드나들게 되었다. 지금은 소리꾼들이 예술인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을 때였다. 장래가 보장되지 않았고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던 소리꾼들의 인기는 바닥을 기었다. 추억꺼리로 남았지만 공연이 끝나고 시공관 뒤 명동식당에서 먹는 갈비탕의 유혹도 컸다.

 

 

명창과 소리 어른들은 젊음 하나만 가지고도 예뻤던 처녀들을 극진히 대해 주었다. 특히 만정 김소희 명창은 이명희 소녀를 끔직히도 아껴 제자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후계자들을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귀한 마당에 장래의 명참감이 제발로 찾아 왔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오늘 날 만정을 보려면 이명희를 보면 된다고 한다. 소리와 몸사위가 빼다 박았다.

 

만정 김소희 선생의 제자로 소리세계에 입문했지만 조금 배우다 곧 시들해졌다. 청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하기에는 피가 너무 뜨거워 진득하게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명희는 만정과 저를 아끼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소리계를 떠나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 밤이고 낮이고 귓가에 맴도는 소리가 있었어. 어미 찾는 어린 아이 소리 같기도 하고 갈증으로 물 찾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란 말이시.” 이 명창은 본토배기 상주 사람이면서도 때로는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사투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최명희의 혼불이 듣기 좋고 읽기 편한 표준말로 씌였으면 그처럼 낙양의 지가가 올랐을까? 그 책을 읽다가 전라도 사투리를 부러 입으로 따라 읊조려 보면 입에 착착 감기는 사투리의 오묘한 맛에 저도 모르게 책에 빠져든다. 전라도 사투리가 입에 배지 않고는 판소리를 하지 못한다. 주부 이명희는 만정 선생에게 절하고 나이 37살에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독한 년 소리 듣고 / 천갈래 만갈래 마음이 찢기지만 /

어쩌겠는가 밥 안 먹어도 배부르고 / 황금보다 더 좋다는 소리 얻고자(득음) /

 

홀로 공부하니 좋고 / 전라도 사투리 느는 재미가 솔 찮았고 /

얄궂은 천막을 의지하여 / 목 쉬면 소리 쉬고 / 목 풀리면 소리하고 /

 

목 터져 나온 피에 혼절도 했다지 / 배고프고 돈 떨어지면 /

산나물이 지천이라 관광객도 가득하고 / 득음의 길이 멀다지만 /

 

독공에 독공을 하면 마침내 소리를 얻는다고 / 만 5년을 공부하였더니 /

소리 오래해도 목쉬지 않고 고운 소리 유지하며 / 소리 높낮이 강약 조절이 원 하는대로 되니 /

 

스승들 앞서 감히 말하기 어려우나 / 이게 소리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

얻는 것은 내 주머니에 넣어 두는 것이고 /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니 /

 

 

이명희는 1990년 전주 대사습놀이 문을 두드려 이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영남 출신 장원은 처음이라 전국이 떠들썩했다. 그 뒤로 인간문화재 지정과 많은 상을 받았지만 허상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다만, 국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국악의 맥 흐름을 알리고 스스로 소리 공부의 깊이를 알아 보고저 할 따름이니.  

 

국악불모지 상주에서 사비를 털어 전국 규모의 국악경연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던 이 명창은 상주에서 좋은 소리꾼을 키우기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다. “진도아리랑이 유명하지만 소리가 좋은 것이지. 상주에는 수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공갈못이 버젓이 살아 있고 공갈못 노래가 오랫동안 불리워졌소. 공갈못 옆에 국악공연장을 짓고 공갈못 노래를 불러 제끼면 보고 들을 수 있는 유래 없는 공연장이 될 것이고. 국악 배우고 관광객도 찾을테고”

 

고창 소리박물관에 걸려 있는 판소리계의 스승들과 이명희 명창의 사진은 몸과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공부한 사람의 발자취다.

  

명창 이명희는=1946년 경북 상주 출생. 60년 김소희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 입문. 63년 국립창극단 단원. 90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 장원. 91년 국립극장서'흥보가'완창. 92년 대구 무형문화재 제8호 지정. 93년 국립극장서 '춘향가'완창, KBS 서울국악대상 판소리 부문 수상. 현재 (사)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이력은 중앙일보 음악전문 이장직 기자)

 

사진 : 대구광역시 남구청 정관식 님, 하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