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부

10여 년 만에 소 사육의 달인의 길로 접어 든 혜성목장 장영환 이사, 장경윤 부친의 30년 가업을 이어 가

맛깔 2015. 1. 21. 23:49

 

 

 

보기 좋았다.

 

한우 1,200여 두를 사육하고 있는 혜성목장의 장영환 이사가 아내를 칭찬하고 아내 서나영 님이

남편의 일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얘기하는 것이.

 

 

공성면에 있는 혜성목장은 장 이사의 부친 장경윤 목장주가 30여 년 전에 소 한 마리로 시작, 지금의 규모로 일궈내

경북에서는 거의 전설적인 목장으로 알려져 있다. 장경윤 목장주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없이 지금의 부를

이루었는데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노력한 애기를 듣자면 며칠 밤낮도 모자란다고 한다.

 

장경윤 이사는 아버지 장경윤 목장주와 함께 목장을 돌보는데 목장 경영의 큰 얼개만을 부친과 의논할 뿐 사료 구입,

입식, 질병 치료 등 목장 경영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장 이사가 결정한다니 30대 중반에 중소기업 규모를 운영하는

2세 경영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간혹 부친을 도와드리기는 했지만 목장 일을 하기는 싫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는 것이

지겨워 보이기도 했고 젊은 날의 꿈은 대도시의 큰 직장에서 넥타이 매고 근무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이해한다.

도시의 삶은 젊은이들의 이상인 것을.

대학에서 기계 공학을 전공하고 김포와 인천공항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그의 이상은 실현되는 듯 했다.

넥타이 매고 양복입고 출근하면 남들이 우러러 볼 줄 알았다. 사실 장 이사는 미남이어서 양복입은 모습이

그럴 듯 해 보였다. 인천공항 개항 초기, 공항에 기숙사가 없어 김포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전철도 없고

교통편이 불편해 출퇴근 하면서 진이 빠져 버렸다. 이로써 도시 탈출의 구실 하나가 생겼다.

어쩌다 한 번씩 전화를 하시던 부친은 목장 얘기는 빠트리지 않고 해 주셨다. 길게 얘기를 않으셨지만 목장을 잊지

말라는 듯. 장 이사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나이 드신 아버지가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해 가슴은 아렸다.

고향에 내려오면 부친은 아들을 데리고 목장을 둘러봤다. 마치 이 목장은 너의 미래라는 듯이. 아들은 부친의 마음

씀씀이를 알았지만 도시 생활은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연봉이 많아 시골 생활은 탐탁지 않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도 없지만 부모를 모른 척 하는 효자도 없다. 전화 횟수가 잦아질수록 아들의 단정한 넥타이는

느슨해 졌다. 고향을 택하자니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잊을 수 없고 직장에 계속 있으려니 부모의 고단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장거리 출퇴근으로 도시생활이 조금 고단해졌을 때 부친이 말씀했다. “이 목장은 자식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일해 얻은 것이다.”

2002년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사표를 썼을 때 직장 동료들은 질시 반 걱정 반의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이왕

하는 것 한국 제일의 축산왕이 되어라.”

목우를 하면서 내친 김에 상주대와 대학원에서 축산 이론으로 경영, 사례와 데이터를 깊이 공부하고 목장에서는

경험을 쌓았다. 소와 함께 자랐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목장 경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새삼 아버지가 위대해 보였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가 다 아시고 실행해 왔다는 말씀이지.

부친은 처음 얼마간 일을 고되게 시키고는 그 후로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장 이사는 분만,

질병, 사료 등을 혼자서 끙끙대며 처리해 갔다. 정 안되면 부친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 이사는 몇 년간은 워낙 힘이

들어 괜히 내려왔다고 후회도 했다. 그렇지만 하나씩 일을 배우고 어려웠던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고는 성취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목장이 좋아 고향에 뿌리박고 살아야겠다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바로 아내 서나영 때문이다. 친구 소개로 만난

 중학교 후배인 서나영은 너무 멋있는 여자였다. 이렇게 멋진 여자가 시골에 있다는 생각에 그냥 고향이 좋아져 버렸다.

천 몇 백두 이상의 소를 키우는 목장의 며느리가 됐으니 부잣집으로 시집간다고 좋아했겠는데요?’라며 아내에게 물어보니

 애처가 남편이 대답한다. “재산보고 시집왔으면 아내가 이렇게 고생을 안 하죠.” 남편의 아내 자랑이 구구절절이다.

목장일 돌보고 유성(10), 우성(8), 민영(4) 아이들을 키우느라 결혼하고 9년 동안 여행 한 번 못 갔습니다.

뿐 만인가요? 소가 출산할 때는 저는 3시간 터울로 나가보지만 아내는 15분 간격으로 나갑니다. 새끼를 밴 어미의

심정으로 그러는 것 같아요. 그것만 하면 다행이게요. 서류정리는 모두 아내 몫입니다.” 그리고는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아내도 덧붙인다.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목장 일을 배웠는지 질병은 거의 수의사를 부르지 않고 혼자서 해결합니다. 일 년에 30회 이상

수의사가 필요한데 1~2회만 수의사를 초청하는 거지요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낮과 밤을 모르고 소를 돌보는

남편을 볼 때 안됐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이런 집은 되는 집안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존경하는 가정은

미래가 보장된 집안이다.

소 파동으로 힘든 때도 있었지만 사육두수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 결과 오늘의 혜성목장이 됐다. 이 목장의

곳곳에는 2대에 걸친 부자의 땀이 배있다. 장 이사는 앞으로 암소를 천 두 이상으로 늘려 번식을 자가로 하려고 한다.

부친이 조성한 목장을 기반으로 열심히 일하면 목장 발전에 탄력을 받을 것 같다고 자신한다. 가능할까?

 

처음에는 소에 받혀 다친 사람도 많아 보았고 덩치 큰 소를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소에게 다가갔습니다.

몇 년 지나니 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더군요. 그러나 소를 돌보기 시작해 10년까지는 항상 마음을 졸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했지요.

 

이제는 감이 옵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내가 목장을 어느 정도 떠나 있어도 괜찮은지, 며칠 또는 몇 시간 정도 가능한지?

가면 안 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목장의 소 상태를 일일이 알아야 될 것이다. 또 하나 소 상태를 아는 외에

대처 방법도 머릿속에 그려 놓아야 가능하다.

 

혜성목장의 장영환 이사는 이제 소 달인의 길로 들어섰음이 틀림없다. 배우고 익히는 부지런으로 끊임없이 공부하면

머잖은 장래에 소 달인의 대접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무슨 분야고 간에 숙달된 장인들의 공통점은 딱 감이 온다.”라는 것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