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시카고 재즈 댄스 학원 박경숙 원장

맛깔 2012. 10. 18. 09:27

 

만능엔터테이너 사반세기

시카고 재즈 댄스 학원 박경숙 원장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많다. 방향을 따진다면 동서남북과 그 사이 동남, 동서 등의 길이 있고

난이도를 생각하면 자주 다녀 평탄한 길, 개척을 기다리고 있는, 길 없는 길, 언덕 길, 절벽 등이 있다.

 

2007년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 인도인은 몸을 먼저 다스리고자 요가 수행을 하였고 불교에서는 마음을 중시하여

선을 행하였다.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인들도 있었다.

 

시카고재즈댄스학원 박경숙 원장   박경숙 시카고재즈댄스학원원장은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예술인이다.

박 원장은 경제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 음악을 택하였고 걸림없는 무소의 뿔처럼 살고자

재즈댄서의 길을 걷고 있다.

 

 

“1984년도였죠. 그룹사운드에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기에 알바삼아 잠깐 하려고 발을 담갔는데

오늘까지 이 언저리에 있네요.” 큰 키, 날씬한 몸매, 풍부한 성량을 지닌 박 원장의 인기는 당시

발간되었던 신문 잡지에서 볼 수 있다. 금상첨화로 한 미모까지 하였으니 팬들이 많을 수밖에.

한 몇 년 가수로 활동하다 외국에서 뮤지컬 가수를 뽑는다는 얘기를 듣고 오디션을 받았다.

파리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예술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노래야 팬들로부터 진작 인정을

받았지만 춤은 조금 서툴렀다.

 

 

밤을 새우고 쉬는 시간을 아껴 열정적으로 춤을 배웠다. 오늘의 시카고재즈학원은 20여 년 전,

유럽에 뿌려졌던 씨앗에서 발아된 것이다. 당시 인기 절정의 박 원장은 많은 돈을 벌었다.

돈 버는 재미보다 팬들의 환호성에 빠져 무리하게 노래를 했던 박 원장의 목이 배겨났겠는가.

성대결절이 생겼다. 수술을 받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녀를 일으켜 준 것은 재즈댄스로의 몰입이었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생명을 잃었던 박 원장은 뉴욕으로 날아갔다. 스텝스재즈학교에서 재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재즈에 대한 안목이 뜨이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강남에서 재즈학원을 열었다.

강남 재즈학원의 효시였다. S라인과 시원한 성격의 박 원장에게 학원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원생은 넘치고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재활치료를 하라고 하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삶의 의욕을 잃었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꽃망울이 맺을 만 하면 꺾였으니까?

가수에게는 치명적인 성대결절이 생겼고 재즈를 하는 선생이 춤을 못 추는 디스크 수술을 받았으니.

여기에 좌절하면 박경숙 이름 석자가 부끄럽지.

2012년 10월

박 원장은 운명에 무릎을 꿇는 대신 시카고의 ‘거스 지오르다노 재즈스쿨’을 찾아 갔다.

재즈계의 거성 지오르다노가 운영하는 재즈전문학교였다.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수준이 달랐고

검사, 의사, 선생부터 전업주부까지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진지하게 재즈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박 원장은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구나. 재활치료와 함께 몸을 가꾸어 나갔다.

알버트는 정말 본받을 만한 점이 많던 친구였다. 검사였던 알버트는 음악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연기를 했는데 특히 느끼한 표정연기는 압권이었다. 야누스의 얼굴과 지성을 지닌 알버트가

 재즈를 출 때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알버트가 불편해 하지 않도록.

성실한 검사 알버트는 직장에서도 평이 좋았다고 한다. 한 곳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에도

몰입할 수 있는 법이니까. 3년 6개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향 부근 상주가 마음에 들었다. 푸른 자연과 맑은 공기, 때 묻지 않은 인심에 끌렸다.

2002년 4월 상주에서 시카고재즈댄스학원을 열었다. 시골이라 행사규모가 작고 때로는

미숙한 점도 있지만 아마추어들은 아기자기하고 형식에 매이지 않는 색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2003년 10월 상주관광호텔에서 시카고재즈학원생들의 재즈댄스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 공연 때 찍은 사진은 여느 전문 프로춤꾼의 공연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벽을 장식하고 있다.

박 원장은 상주 재즈의 역사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년을 갓 넘겨 배운

초등학생들이 2006년 경북 재즈댄스경연대회에서 1위를 한 점, 열정적으로 춤을 배우던 학생이

대학에 무난히 들어갔던 것은 박 원장의 자랑이다. 안동MBC에서 6월 27일 시카고재즈댄스학원를

찾아 방송해 준 것은 박 원장이 지역 재즈문화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문화가 바뀌면 안목이 달라지고 안목의 변화만큼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박 원장은 춤이라면 음습한 구석을 떠올리던 사람들이 시카고재즈댄스 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부러워하며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냐고 물어 본다는 말에 긍지를 가진다.

 

 

 

 

밤늦은 무렵, 검사, 선생, 의사, 한의사, 가정주부, 학생, 간호사, 영양사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재즈애호가들이 재즈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박 원장의 모습도... (2007년 7월 22일 : 주간상주)

에필로그 : 의사, 한의사, 선생, 여검사, 주부, 영양사 들을 춤바람(?) 나게 하고 대학 수석

입시생들을 양산하는 등 상주 재즈계에 숱한 전설을 남긴 박 원장은 이제 은퇴하려고 한다.

워낙 체력 소모가 많은 직업이라 힘들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몸이 불편해 돌봐주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4년 초 학원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지나던 길에 들러 얘기를 듣고 너무

아쉬워 글을 남긴다. (201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