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부

백 년 거목을 키우는 변홍석 양묘인 (2-2)

맛깔 2013. 9. 5. 08:36

여든 넘은 지금도 그렇듯이 젊은 시절의 변 옹은 참 부지런히 일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함을 담보로 기업을

물려 받았는데 기대에 못 미치면 어른을 욕보이고 자신도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거의 모든 양묘 기술을 머릿속에 담았지만 기술은 성실을 대신할 수 없다는

믿음에 따라 잠시라도 몸을 놀리지 않았다.  

 

 

“상인은 신용이 제일 중요하지. 나무를 키워 파니까 상인이야. 신용이 별것 있어? 좋은 상품 제 때 납품하면

그게 신용이지. 묘목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는 것을 활착이라고 하는데 우리 농원의 활착율이 아주 높았어.

키울 때부터 정성을 들이는 것은 기본이고 커서도 시원찮은 것은 솎아냈어. 그게 활착율을 높이는 비결이야.

활착율이 좋으려면 T/R율이 낮아야 돼. 뿌리목을 중심으로 지상부와 지하부를 나눠 얻는 비율이지.”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비결이다.

 

천 리 가는 꽃향기에 비해 사람의 덕은 만 리를 간다고 했으니 양묘업계에 변 옹의 정직함과 명성이 짜하게 알려졌다.

김동배 사장이 선택한 인물이라는 사실 외에는 별 볼일 없어 반신반의 했는데 그 자신의 힘으로 상주농원을 탄탄한

업체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차로 무거운 것 다 실어 나르잖아. 옛날에는 차가 어디 있어. 있더라도 귀한 차를 아무나 쓸 수 있어?

죽으나 사나 지게와 리어카로 실어 날랐지. 하천 주변 모래땅에 아줌마들이 종자를 심으면 아저씨들이 바람에

날라 가지 않도록 덮어 줄 가는 모래를 먼 하천에서 가져와야 되는데 그 길이 참으로 멀었어.” 

   

 

2~4 킬로미터 떨어 진 하천에 쌓인 친 모래를 장정 50여 명이 지게에 지고 걸어 왔다고 한다. 습기 묻은 모래를

가득 담은 지게는 장정이 겨우 일어 서 걸을 수 있는 무게였을 것이다. 장정들은 지게를 지고 오면서 가장으로서의

짐을 생각하고 뙤약볕과 목마름과 어깨를 파고드는 지게 무게의 고통을 잊으려고 했을 게다. 짐 지고 오면서 한 번도

쉴 수 없었다. 한 번 지고 오면 품삯 한 몫을 받았는데 ‘당시 돈으로 50원 정도 였다.’고 한다.

   

 

묘목을 키우려면 국립채종원에서 나눠 준 종자를 물에 담가 우량종자를 고르고 포트에 뿌려 모래로 덮은

다음 키우다 7, 8월 경에는 돌보고 제초 작업하느라 새벽부터 밤 8,9시까지 쉴 새가 없다. 현재 시설하우스

3천평, 노지포트묘 2,000평에서 년 100만 본 가량 생산하고 있는데 상주농원 전체를 모두 합하면 1,000 만 본 정도 된다.

 

1-1-2, 1-2-2 등의 숫자는 1년 짜리를 1번 이식하고 2년 차 등의 숫자로 수종에 따라 묘목을 당해 심어 생산할 수도 있고

2, 3 회 이식하고 1, 2년 기다려 뿌리가 잘 내린 다음에 산에 식재할 수도 있다. 이식할 때는 썩는 비닐과 끈으로 뿌리를

싸고 묶는다. 묘목 한 그루가 산지에 심어지기까지 적어도 수 십 곱의 잔손이 가니 그 수고로움이 어떠랴.

7월의 땡볕에서도 할머니들은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하늘은 소용되는 사람을 쓰기 위해 성실한 사람에게도 시련을 줘 그 그릇을 알아본다. 변 옹은 물난리를

두 번이나 겪었으니 한 번은 1980년 8월 홍수로 인해 하천 주변에 심어 놓은 묘목이 모두 유실됐고

1998년 8월에도 홍수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 다 수 억 원의 손실을 봤지만 산에서 푸릇푸릇 자라는

나무를 보며 상심을 딛고 일어섰다.

 

 

1980년대 양묘업자는 천 명을 헤아렸는데 요즘은 일이 고되다고 그만 둬 60여 업체 밖에 남지 않았다.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겉모양 번지르르한 일만 찾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니겠냐고 한탄한다. 당시 상주농원

주변에 살던 시집가려고 날 받아 놓은 처자들도 일을 했는데 그들은 부지런함 덕인지 모두 다 잘 살고 있으니

경제가 어렵다고 하늘만 원망하지 말고 팔을 걷어 부치고 일하면 좋은 수가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다.

당시는 시집 갈 날을 받은 처자들은 일을 안했다고 한다. 변 옹은 어릴 때부터 일을 함께 해 온

 아들 변해광 상주시의원과 손자 원상이가 가업을 잇고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모든 사업이 그러하듯 양묘사업도 오직 믿음과. 신뢰. 정직으로만 이룰 수 있는 사업이다. 변홍석 옹은 사소한

이익을 얻기 보다는 바른 길을 가고자하는 순수한 농심으로 오늘의 상주농원을 만들었다.

 

 

변 옹의 며느리, 그러니까 변해광 시의원의 부인은 지금도 매운탕을 먹지 않는다. 손님들과 고객들이 오가며

 “내서에는 매운탕이 유명하다던데”라는 얘기에 어쩌다 한 번 먹는 객을 위해 주구장창 매운탕을 끓인 탓이다.

상주농원을 위해 가족들의 수고가 컸다는 말이다. 변 옹은 그 며느리 덕에 집안이 번성하였다고 항상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