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부

한우, 내 손안에 있소이다.

맛깔 2011. 8. 11. 10:56

축산인 강경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상주 사람이면서 상주 사람이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구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부친은 어린 아들 강경호를 대구로 보내 공부시켰다. 당시만 해도 농촌에는 희망이 없다고들 했다.

 

 

강경호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외로웠지만 열심히 공부해 영남대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몸은 멀어도 마음만은 항상 부모님과 함께여서 대학 공부는 축산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선친이 소를 키우던 모습이 항상 눈에 아른거렸다고 하니.

 

이왕 도시에서 사는 것 서울로 가자. 대학 졸업 후 강경호는 서울의 중소기업에 취업하여 부지런히 일했다. 아마 선친의 부지런한 습성을 본받아 그럴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 하면 입사 당시 컴퓨터 조금 알던 청년이 무려 7년 동안 전산 과장을 꿰찬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는데 더 좋은 것은 아주 어여쁜 처녀 권순미 양으로부터 장래를 인정받아 그의 남편이 된 것이다.

 

 

회사에서 촉망받던 강경호 과장은 97년 10월 말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무려 한 달을 고민했다. 고향에 내려가 부친이 남겨 둔 땅과 소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회사에 미래를 걸 것인가? 결론은 고향 앞으로.

 

또 한 달 동안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 한 명 있던 새댁은 교육 때문에 서울에 있고 싶어 했지만 워낙 믿음직한 남편 덕분에 상주로 내려오게 됐다. 아내의 조건은 단 한가지였다. “애들 교육을 위해 상주시내에 남는다.”

 

 

도시에서 자란 강경호는 농사일이 서툴렀다. 부친의 유산이었던 소 22마리, 포도 700평, 농토 40마지기와 배 과수원 일을 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1주일 농사를 짓고 다음 1주일은 앓아누웠다. 거의 1년의 적응 기간을 거쳤다. 이제야 제 몫을 하는 농촌 장정이지만.

 

제대로 된 농촌 일꾼 강경호는 전업을 위해 소와 농토만 남겨 두고 다른 것은 다 처분했다. 그리고 한우에 집중했다. 4년 전 ‘중동한우작목반’을 결성하고 회장으로 일하며 신우영농조합법인을 설립, 대표로 취임했다. 늦깎이 농부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어 대표가 됐을 것이다. 작목반은 한우사육에 필요한 정보 교환을 위해 법인은 조사료 재배를 위해서였다.

 

 

한우 150여 마리를 키우는 축산 경영인 강경호는 사료비 절감을 위해 법인 회원들과 함께 매년 조사료 재배지를 임차한다. 그 규모가 무려 30만평이다. 추수 끝난 논에 파종하고 이듬 해 5월에 수확하는 수단그라스, 호밀 등의 수확량은 500킬로그램 뭉치로 이천 개나 된다. 일부는 회원 농가와 함께 나누고 나머지는 판매한다. 사료 값 절감 외에 판매 수익과 경관 직불금이 제법 되니 강경호는 경영인으로 성공한 셈이다.

 

남편 강경호의 부부얘기다. 처음 시골에 내려 왔을 때 아내와 단 1초도 행복하지 않았던 강경호는 이제 단 1초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비결은 부모 교육에 있는데 부부 사이가 나빠 고민하는 분은 행복한 남편 강경호에게 직접 물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