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부

한우 축산농, 김강평 님의 50년 벽창호 인생

맛깔 2011. 9. 16. 06:39

벽창호는 고집이 세고 완고하며 우둔하여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무뚝뚝한 사람을 말한다. 이는 평안북도 벽동ㆍ창성 지방에서 나는 크고 억센 소인 벽창우에서 나온 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벽창우는 평소에 순하고 주인 말을 잘 듣지만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으면 어느 누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제 갈길 가는 소란 뜻 일게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얘긴데 고집 없고 신념 없는 사람이 일을 이루는 것을 보았는가?

 

 

남들과 잘 어울리며 무난한 인물이라고 평을 듣는 사람들은 출세는 할 수 있을지언정 남들이 안가는 길을 개척하여 업적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세파의 흐름을 타기 위해 노력하지 흐름을 거슬러가는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외서면에서 창훈농장을 경영하는 김강평 님(70세)은 오로지 한우만을 키워온 지 어언 50여년이 지났다. 한우만 키우면서 중간에 한 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었고 한 눈을 팔아서도 안 되는 줄 알았다. 40대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은 직업에 충실한 자, 직업에 알맞은 얼굴을 지니라는 말과 같다. 학자는 학자답게 농부는 농부답게 전업주부는 전업주부다운 얼굴이 돼야만 직업에 성실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다. 김강평 님은 소의 우직함을 닮았고 소의 튼튼함을 지녔기 때문에 그는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임에 틀림없다. 상주 오일장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성실한 얼굴을 지녔으면 김강평 님이라고 해도 틀림없다.  

 

 

축산농 김강평 님의 우직함을 알 수 있는 것 3가지.  

 

하나. 그는 축산농의 선구자다. 그는 나이 스물에 본격적으로 부친이 키우던 소를 돌봤지만 한우 축산 전업을 한 것은 나이 마흔 들던 무렵이었다. 전업 축산농은 그 동네에서 처음이라 애로사항이 많았다. 주사주고 송아지 출산하는 것이 지금은 쉽지만 당시에는 힘이 들었다고 한다. 철새가 이동할 때 대형 앞에 있는 기러기는 바람을 헤치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곱절로 힘이 든다. 그러나 앞장 선 기러기로 인해 뒤따르는 기러기들은 수월하게 하늘을 난다. 그가 부지런히 노력한 덕분에 이웃에서도 축산 전업을 선언하게 되었는데 그 조그만 동네에서 축사 120평이 넘는 집이 12군데나 된다. 축산농 선구자의 축산 기술은 고스란히 이웃에게 나눠졌다.  

 

둘. 소 사육두수는 그대로 유지했다. 소를 키우면서 소 파동이 3번 정도 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소 팔고 농토 팔았지만 김강평 님은 두 세 사람이 하던 일을 혼자서 하는 것으로 구조조정을 끝냈다. 가족과 자식 생각하면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니 사육두수가 늘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 수를 유지했다. 현재 혼자서 80여두를 사육하고 있다.

 

 

셋. 거래처는 변하지 않는다. 축산을 하면서 약, 주사, 사료 등 필요한 물품이 많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같은 거래처와 거래를 하는데 최근 몇 십 년 거래하던 가축병원이 문을 닫아 다른 가축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며 애석해 했다.  

 

외서초등학교를 나와 나이 스물에 결혼을 한 김강평 님은 오로지 한우 사육만을 고집했는데 그에게 왜 한우만 키우게 됐느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할 것 같다. 고작해야 “소를 키우다보니 한우를 선택했고 그러다 보니 한우만 키우게 됐다”고나 하지 않을까. 매끄러운 답변은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들로부터 들으면 된다.  

 

소 잘 키우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니 선량하고 우직한 웃음을 보이며 나지막하지만 힘찬 소리로 얘기한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몸에 밴 소 사육 비결이 술술 나온다. “소나 사람이나 똑 같지. 소나 사람이나 관심을 가지고 돌보면 별 탈 없이 잘 크지만 내팽개치면 잘 자라지 못해. 애정을 받고 자란 소는 미움받고 자란 사람들보다도 더 정이 가도록 행동하지” 김강평 님이 집 대청마루에서 바라보이는 축사를 보며 손뼉을 치니 소들이 ‘음매’하며 소 주인을 쳐다본다.

 

 

“나는 시간만 나면 축사로 가 소 먹이를 주며 그들과 장난치고 놀이도 한다. 내가 축사에 들어가면 소가 곁으로 와 옷도 물고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내 민다. 그러면 아픈 소, 불편한 소, 기분 좋은 소들이 한 눈에 다 보인다. 아픈 소는 치료해 주고 건강한 소에게는 미소를 보낸다. 내 자식들은 잘 안아 주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들었지만 송아지는 많이, 그리고 자주 안아줬다” 축산농 김강평 님은 그렇게 소를 키우면서 소의 정직함과 우직함을 닮아 갔을 것이다. 그는 사람 잘 생긴 것은 몰라도 잘 생기고 병치레 없이 잘 클 것 같은 송아지는 알겠다고 한다.  

 

그는 소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선진지 견학을 자주 다녔는데 평소에는 못가고 주로 비오는 날만 골라 갔고 축산으로 전국에 명성이 있는 경기도 안성 목장에도 갔다. 선진지 축산농들이 가르쳐주면 모르는 것은 부지런히 마음에 새겨들었고 방법이 다른 것은 한 귀로 흘렸다.

 

힘이 장사였던 김강평 님은 조부와 부친을 93세, 94세까지 집에서 모셨다. 여자가 공부 많이 하면 팔자가 세다고 하던 옛날에 어른들이 손녀 공부를 계속 시키라고 해 올 해 쉰 되는 큰 딸은 교대를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맏딸은 골짜기 시골에서 처음 대학을 간 여학생으로 생물을 열심히 키우는 사람은 자녀도 잘 키우는 모양이다.  

 

김강평 축산농의 성공적인 소 사육비결은 부지런함에 있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은 하늘도 못 말린다고 하지 않는가. 자녀 양육과 소 사육 둘 다 성공한 부지런한 축산농 김강평 님의 미소가 우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