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현실과 이상에서 갈등하는 범최의 작가일지

맛깔 2012. 12. 10. 21:09

()과 속(), 사람들은 한 발은 진흙탕에, 나머지 발은 구름 위를 밟고 다닌다. 형편에 따라 현실적으로 살거나 아니면 이상을 꿈꾸며 살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속물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이상주의자의 꿈을 비웃기도 한다.

 

 

 

이상주의자 예술인 범최는 속에 살면서 성을 추구하지만 마음은 이미 성에 다다르고 있다. 범최는 서울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연세대에서 박물관교육을, 동국대 문화예술 대학원에서 문화재를 공부했다. 작가는 사진과 재학 시 이미 기성작가의 명성을 누렸다. 교수님의 추천으로 당대 제일의 광고회사로 평가받던 오리콤에서 인턴사원을 했는데 졸업 무렵 오리콤으로부터 정식사원을 제안 받았다. 성이 나설 차례다. 왠 치기어린 행동. 눈은 높고 꿈이 커 공부를 핑계로 그 자리를 차 버렸다. 마음은 이미 예술의 길을 걷고 있었다. 군 제대 후 대기업 공채에 합격했으나 가슴에는 뜨거운 불씨가 남아 있어 인생항로를 돌려 충무로의 상업사진 스튜디오 실장으로 자리 잡았다.

 

타고난 감성과 탄탄한 기본기로 유명 백화점의 쇼핑가이드 북을 맡아 촬영하고 유명세를 얻어 백자, 청자와 고가구 등의 골동품 촬영이 줄지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유명 인사들의 프로필 사진과 한국의 미를 촬영했다. 조병화 시인, 피천득 수필가, 정일성 촬영감독, 석주 큰 스님 등 수많은 인사가 그의 렌즈 앞에 섰다. 황금 시절, 재기는 발랄하고 젊음은 있었다. 창창한 앞날에 탄탄대로였다. 수많은 고객들과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호사다마, 사장이 이민을 가버렸다. 졸지에 직장을 잃고 이제는 안정된 직장에 자리를 잡자고 주택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문화홍보부에서 홍보전문 요원으로 근무했다. 직장에 있으면서도 사진 촬영을 위해 토, 일요일에는 먼 길을 떠났던 최 작가는 어느 날 밥벌이의 고삐를 풀었다. 순수예술에 대한 갈망이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수예술을 위해 은행에서 명퇴를 한 후,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부모님 고향 부근이란 이유로 젊은 시절 사 두었던 전원주택으로 8년 전 귀농했다. 민족예술인 총연합, 민족사진가 협의회 창립멤버인 최 작가는 그간 여섯 번의 사진개인전과 세 번의 조각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열었으며 내년에도 인사동에 전시가 예약되어 있는 상태이다. 지금도 여러 군데서 촬영의뢰가 오지만 오직 순수작가의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최 작가는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 아직은 성()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2008. 9)